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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Mar 24. 2023

첫인상이었던 파우치는

지금도 없다

반짇고리 좀 빌려줘

책가방도 겨우 들고 왔는데...


대일밴드 있지? 하나만  

보컬이 없어서 안 키우는데...


으유,

것은 다 있을 것 같이 생겨 있는 게 없어요. 쯧쯧


혀 차는 소리가 수십 년 전과 맞닿은 공기를 뚫고 달려와 귓가에서 왕왕 울리는 듯하다.


얌전하고 차분한 여학생들은 대체로 책가방 안에 파우치를 따로 챙겼다. 그 안에 휴지, 손크림, 반짇고리, 거울, 대일밴드, 심지어 스타킹까지 필요할 때를 대비해 늘 가지고 다녔다. 학기 초반까지는 내 가방 안에도 파우치 백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지 빌려 달라고 아양 떠는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들처럼  빌려 쓰는 족속이란 걸 알고 난 후로더 이상의 간살은 들을 수 없었다.


쇼트커트에 보폭 큰 걸음걸이, 야성적인 말투, 중성적인 목소리 사방에서 보아도 머슴아라 쓰인  아이. 새까만 교복 치마보다 바지가  모나지 않게 어울렸 아이. 대일밴드를 찾는 동무에게 자신의 파우치를 열어 덥석 내밀던  인심 후한 그녀. 그녀 알고리즘을 차지한 파우치 백은 우리에게 낯섦과 놀라움의 표본으로 삼을 만했다. 그녀의 파우치 백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데다 스타킹에 손톱깎이까지 준비된 완벽한 세팅이었다. 효율적으로 구성된 그녀의 파우치 백이 드러난 이후 빌려 쓰는 족속들은 호시탐탐 그것을 노렸다. 그녀의 파우치 백은 느닷없이 발생한 문제를 오류 없이 감당했기 때문이다.


허뚜와리!

이 분은 안 챙길 것 같이 생겨 없는 게 없어요. 배워라 쫌...


왜 나만 배워?

이것아, 니 첫인상이 파우치 백 있을 거라고 거짓말을 했잖니. 그게 죄야...


뭬야?


첫인상을 다른 족속일 거라고 판단한 건 너희들 죄니 배울 수 없다고 우기며 깔깔댔던 십 대의 첫인상은 그닥 나쁘지 않은 것으로 자진 결론을 내렸다.


내 의사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정해진 첫인상은 파우치가 있을 법한 이미지였다. 아마도 그들의 뇌에 처음으로 입력된 내 모습은 소지품까지 챙기는 차분한 여학생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녀에겐 있고 내겐 없었던 파우치처럼 첫인상이 다 맞는 건 아니지만 기대감을 갖게 하고 관계의 시동을 거는 이유가 되었던 건 분명하다.


첫인상으로 내린 성급한 판단 때문에 누군가는 편견에 갇힐 수 있고 또 다른 이는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근거가 부족한 판단 때문에 피해자가 속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 현장에서 면접을 볼 때도 취업 희망자가 질문 사항에 얼마나 해박하게 답을 하느냐보다 그 사람의 첫인상이나 성실성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곤 한다. 사람은 맨 처음 눈에 들어온 특징이나 정보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밥벌이에도 영향을 미치는 만큼 첫인상으로 기선 제압할 필요는 있을 듯하다.


눈에 보이는 외모나 옷차림, 버릇, 또는 말투나 타고난 목소리로 우리상대의 첫인상을 결정짓곤 다. 특히 말투나 제스처, 얼굴 표정은 본심의 90%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고 하니 첫인상은 내 마음의 바코드인 셈이라고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첫인상  나이토 요시히토》에서 한 말에 수긍이 간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드러나는 내가 이왕이면 인간성 괜찮은 사람이고,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인상이고 싶은 건 당연하므로 마음 상태를 늘 점검하려 한다. 인상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갈고 닦아 고정되는 부분도 있으니 평소에 내외면으로 충실함과 긍정적 태도를 가지려고 신경 쓴 사람은 평온한 인상일 수밖에 없다. 상대도 나도 첫인상에서 호의적인 마음이 움텄다면 오랜 관계를 가질 가능성이 높을 거라 본. 


온전한 어깨를 위해 가방은 간결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지금도 비록 파우치는 생략 중이지만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나 아닌 사람, 가면 쓴 사람으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대신 궁서체 같은 첫인상을 위해 나는 오늘도 진지한 마음을 연습 중에 있다. 첫인상은 관계 형성에 이바지하는 신뢰이며 매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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