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순미 Sep 23. 2022

훅 치고 들어온 남자의 향기

송도의 하루

여름보다는 기력이 쇠했지만 가을과 합의를 보지 못한 햇살이 여지껏 여름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뒷에 맺힌 촉촉한 땀방울이 집게핀으로 머리카락 좀 올리라고 아우성이다. 9월 한낮의 심통이 야단스럽.


기꺼이 시간을 낸 아들과 함께 가을이 어디쯤 오는지 탐색하러 인천광역시 송도국제도시나섰다. 여기저기 널린 마천루가 스마트한 도시라고 우쭐대는 것 다. 송도는 해양계획도시라 여름엔 바다 공기가 유입돼 대도시와 3~4도 정도 차이가 나서 열대야로부터는 해방타운이라더니 낮엔 별 영향이 없어 보인다. 


아들은 복합 쇼핑몰 '트리플 스트리트'주차장으로 들어선다. A동에서 D동까지 네 개의 건물 사이사이 세 개의 거리로 이루어진 복합문화공간이다. 먹거리와 패션, 키즈, 문화 공간이 들어선 건물 사이를 느적느적 걷다가 햇살을 피해 그늘로 들어서 고개를 드니 하늘가에 다채로운 우산 수백 개가 살랑거린다. 청춘의 꿈처럼 비비드한 모습이다. 여름 열기와 세찬 빗줄기를 견디고도 엄격한 건축물 사이에서 감미로운 낭만을 품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층으로 내려가니 그 곳은 또 다른 세계다. 한식, 중식, 양식, 일식 다양한 먹거리에 패션가, 카페, 가구, 와인 매장이 빈틈없이 나열돼 있다. 고양이 무늬 니트가 가을이 왔다고 설레발을 치기에 진한 눈길로 적선을 베풀었다.


저녁은 뭘 먹을까? 이왕이면 평소 접할 수 없는 특이한 요리를 먹어보자고 의기 투합한 후 '바네스타코'로 향한다. 멕시코 요리도전하기 위해 선인장 모양 손잡이를 힘껏 열어 젖힌다. 붉은색과 노랑, 초록으로 꾸민 멕시코 분위기가 강렬하게 풍긴다. 정면으론 멕시코 국민 탄산음료 '하리토스'가 상큼한 색감을 뽐내며 진열돼 있다.


뭘 주문할까?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파히타( fajita-구운 쇠고기,닭고기 등을 야채와 함께 토르티야에 싸먹는 요리)'가 대문자로 다가온다. 골고루 먹어보자는 심산으로 '스페셜 콤보 파히타'를 주문한다. 둥그런 프라이팬에 구운 양파와 파프리카를 깔고 그 위에 얇게 저민 소고기 스테이크, 새우, 가늘게 찢은 돼지고기가 수북하다. 다른 접시엔 과카몰리(으깬 아보카도로 만든 멕시코 소스), 로메인(로마인이 즐겨 먹던 상추), 피코데가요(토마토,양파,고추,고수 등을 게 잘라 섞은 멕시코 소스), 슈레드 치즈가 얌전하게 놓였다. 그 외 여러 종류의 소스가 토르티야, 피클과 함께 가득한 차림이다. 없어야 할 물기가 흘러 번거로웠지만 가늘게 찢어 양념한 돼지고기가 입에 잘 맞아 그런대로 만족했다. 아들은 엄마표 과카몰리가 더 다고 치켜세운다.

'웬일이래? 말수 적은 녀석이.'

송도 마천루가 그랬듯 나도 한껏 우쭐거린다.


저녁을 먹은 후 '센트럴 파크'향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공원은 조명에 싸여 눈부셨다. 하늘 높이 치솟은 초고층 건물들 사이로 일명 더위사냥 빌딩보였다. '포스코타워송도(305M,지상65층,지하3층)'는 송도의 상징으로 마치 '더위사냥'과 비슷한 형태여서 빙그레 회사로 아는 사람들도 있단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로알드 달)'에서 초콜릿 성이 녹아 흐르듯 더위사냥 빌딩이 슬러시로 흐르면 대박이겠다기에 나도 쌍엄지를 올렸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개봉됐을 때 쏜살같이 예매했던 아들의 어린 기억이 술술 쏟아졌다. 함께 걷는 산책로에서 아들은 초등생이 되고 나는 앳된 엄마가 되었다. 우리 얘길 엿듣는지 해수면에 비친 불빛은 해먹처럼 건들대 산책로의 구절초는 희끗희끗 흘끔거렸.


석기 시대 토기처럼 생긴 '트라이보울'이라는 건축물이 보인다. 인천세계도시축전 행사 기념관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지금은  전시, 공연,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단다. 독특한 외관조명 따라 불그레하다 이내 보랏빛으로 물든다. 그 아래 야트막한 콘크리트 다리로 내딛는 걸음은 '영주 무섬마을'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기분이다. '트라이보울'에 따뜻국화꽃차 한 잔 우려 마시상상에 빠져 다리를 돌아 나온다.

송도에서 보낸 하루는 지나간 시간도 훑어보고 지금의 시간도 갈무리한 느낌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서 아들의 속내도 알게 되고 내 생각도 전해보았다. 고인 시간처럼 갑갑했던 마음에 새로운 시간이 차오르는 것 같아 가벼운 설렘이 일었다. 사는 게 늘 특별할 수도 없고 특별해야만 행복한 건 아니니까 순간순간 작은 기쁨으로 채워가자는 아들의 말이 제법이었다.

'뭐지, 훅 치고 들어오는 남자의 향기는? 짜아식, 말없는 녀석이 이런 말도 할 줄 알고. 진짜 뭐지?'


활기를 낚아올린 나들이여서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낯선 도시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이국적인 나들이를 누린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내컷이 선물한 인생네컷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