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날을 보내고 신년을 맞이하는 첫날의 저녁 식사가 끝나갈 무렵 아들이 구글 포토에 옛 사진들을 저장해 뒀다며 TV와 연결해 보잔다.
허걱! 세상 정말 따라갈 수가 없구나.
기계치인 나는 폰과 TV를 연결해 사진을 볼 수 있다는 문명에 놀랐고, 사진 속에 박제된 앳되고 싱그러운 내 모습이 낯설어 또 놀랐다. 지나간 세월이 야속하면서도 되짚어갈 시간이 있다는 것에 저녁내내가슴이 추썩거렸다.
오빠, 저 패션 뭐임?
화면에 나타난 아들의 회색 티셔츠엔 'dama'라고 쓰였다.
'성은 돈이요 이름은 JY(절약)란 놈이랑 한창 썸탈 때라 짝퉁을?' 스치는 찰나
원래는 'puma'인데 당시 당구치는 푸마그림 밑에 'dama'라고 쓰인 티셔츠가 애들 사이에서 유행이었어. 반에서 반 정도가 저거 입고 다녔을 걸. 키들키들 크하하.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무렇지 않게 따라 웃었지만 속으로는
허뜨, 괜히 쫄았네.
상하의에 양말까지 하늘색으로 통일한 채 검정 샌들을 신은 아들이 화면에 나타나자 딸은
엄마가 저렇게 입혔어?샌들에 웬 양말? 거기다 깔맞춤?
설마 내가? 지(저) 혼자 저랬겠지.
딸이 '스타일 쩐다'고 웃어 젖히자 아들은 엄마 스타일 아니냐며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헌니 주고 새이 달라며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딸은 첫니 뺄 때의 두려움을 아직도 기억했다. 얼마나 엄살이 심했는지 춘향이 그네처럼 흔들리는 앞니를 1박 2일간의 입씨름 끝에 뺀 기억이 떠올랐다.
입술을 오므린 채 토끼처럼 앞니 드러내며 동그란 눈 치켜 뜬 딸의 우스꽝스러운 표정 앞에서는 온 식구가 배꼽을 잡았다. 딸은 사진마다 다양한 표정으로 자신을 표현했고 표정마다 웃음을 달고 있었다.
주름을 상실한 당당한 남편도 한껏 웃고 있었다. 젊어서도 제 나이보다 더 들어보였던 터라 나이들면 오히려 젊어보일 거라는 말 자주 들었는데 틀린 말이었다. 흐르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듯이 늘어가는 나이도 거스를 순 없었다. 짠했다. 뭐하다가 저리 나이만 들었나 싶어 옆을 보니 왜 그르셔?하며 멋쩍게 웃었다. 푸시식 따라 웃는 바람에 다행히도 축축한 내 마음은 들키지 않았다.
TV화면에 트로피컬하게 펼쳐지는 거제 외도가 나왔다.
저기가 달팽이 화장실 있던 곳인데......
그런 게 있었어?
똑같이 찍어보고 싶다.
니 엉덩이가 저기 들어갈까?
꺄르르 꺼륵 꺼륵
잊힌 건 잊힌대로 생각나는 건 그것대로 아스라히 멀어졌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저마다의 기억들이 뒤섞인 그날 저녁 옛 사진 둘러보기는 리마인드 외도 여행을 떠나자는 약속으로 막을 내렸다.
큰아이가 초등생, 작은애가 유치원 다닐 무렵 여름 휴가 때다녀왔던 외도. 섬의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보았던 호랑가시나무의 실체도 그곳에서 처음 마주쳤다. 잎이 뻣뻣하고 윤기가 남다른 호랑가시나무는 타원상 육각형 각점에 억센 가시가 있지만 꽃말은 평화라고 한다. '사랑의 열매' 모티브가 된 붉은 열매가 매력적인 호랑가시나무는 호랑이가 이 나무의 가시로 등을 긁었다는 데서 그 이름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단다. 호랑이의 효자손인 셈이다. 비행기 타고 가야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다시 한 번 오자고 마음에 새겼는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두 아이는 훌쩍 자라 직장인이 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찾을 외도가 몹시 궁금했다.
포말을 흩뿌리며 달리는 유람선에 몸을 태우고 지세포항을 출발한 우리는 곧 외도 보타니아에 도착했다. 그대로인 것과 새롭게 조성된 것이 조화를 이루며 색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초입에 곧추서 있던 外島 표지목은 사라지고 대신가로로 누운 OEDO Botania와 외도보타니아 두 가지 버전이 우릴 반겼다. 들어서자마자 外島 표지목에서 찍어야 할 리마인드 사진 한 장이 날아간 걸 알아차리고 조금은 아쉬웠다.
(외도보타니아는 기존 섬 이름 외도에 식물의 낙원[botanic + utopia]을 합성한 이름이란다)
외도 시그니처 비너스 정원은 새롭게 정비된 모습이 더 이국적이었다. 오른쪽은 도리아식으로 건축한 파르테논 신전처럼 보이는 아치형 테라스. 거기에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머릿결을 휘날리며 가리비 위에 섰고, 피렌체를 떠나 외도에 정착한 다비드는 소년 영웅의 강인한 면모를 자랑하며 비너스와 한 공간에 버티고 있었다.
가운데는 칼데라 형태를 띈뜰. 자색과 적갈색의 조약돌로 기하학적 문양을 만들고 그 가장자리에 형형색색의 꽃을 심은화려한 정원이다. 버킹검 궁전 뒤뜰이 모티브라기 보다는 에스닉한 정서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색감이나 문양이 독특했다.
왼쪽엔 '겨울연가' 마지막 촬영지라는 리하우스. 금방이라도 재촬영에 들어갈 것처럼 메이크업을 마치고 대기중이다. 예서 하룻밤 자고 정원을 바라보며 모닝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다면 몰디브에서 모히또 한잔 마시는 기분이랑 맞먹겠지?
그늘 한 점 허락하지 않은 비너스 정원은 코발트빛 하늘과 어우러져 신들의 정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선인장 정원, 플라워 정원, 뱀부로드를 돌며 아는 장소가 나타나면 우수한 내 기억을 검증받은 기분이 들어 더 반가웠다. 애들은 애들대로 사진에 찍혔던 장소가 나타나면 옛 기억을 더듬으며 똑같은 자세로 "찍어주세요"를 남발했다. 작은 조각상 앞에서는 키를 낮춰 스쿼트자세로 찍었고, C자를 오른쪽으로 회전시킨 향나무 아래서는 공간이 좁아 옴짝달싹 할 수가 없어 키들키들 웃음을 흘렸다. 향나무가 작아졌다고 우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U자로 파인 새 조각상 등에 올라타 사진을 찍어야 하는 딸은 엉덩이가 들어갔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 파이팅을 외쳤다.
카메라에 솔선수범 얼굴을 디미는 녀석들. 오랜만에 천둥벌거숭이들처럼 보여 늙은 부부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벤베누토(이탈리아:환영합니다)정원에서는 튤립과 양귀비가 회오리 감자를 빼다박은 나무와 함께 외도를 빛냈다. 당 현종이 양귀비를 해어화(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라 부르며 아꼈다는데 나붓나붓 얇은 꽃잎이 주홍빛을 흘리며 바람따라 펼치는 춤사위가 흡사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처음 본 홍가시나무는 난로에 고데기를 올려놓은 변두리 미장원에 다녀왔는지 동글동글 바가지 머리를 한 채 붉은 자태를 뽐냈다. 어울렸다. 거푸거푸 카메라를 들이댔다.
아왜나무로 빽빽한 천국의 계단은 높이가 낮아 무릎 약한 내가 편히 내려올 수 있어 흡족했다. 천국의 계단은 다 내려와서 올려다 본 풍경이 더 천국 같았다. 대형 어닝을 펼친 듯도 보이고 남해의 다랭이 마을 같기도 한 천국의 계단. 천국은 올라가는 게 상식이나 내려가는 코스로 발상의 전환을 꾀한 것이 흥미로웠다.
바다 전망대에 앉아 멀리서 묻어오는 쪽빛 바람을 맞았다. 바람이 스며든 바다도 쪽빛이었다. 쪽빛이 고인 물에 헹군 듯 내 머리도 쪽빛이 되었다. 달고 살던 편두통이 바다 깊숙한 곳으로 풍덩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울트라 마린처럼 짙은 파랑으로 전신이 채색된 채 소망의 등대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내려갔다.
계단참에 스페인 구엘 공원의 대표작인 긴 타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무릎이 시원찮은 나를 구엘이 꼬드겼다. 소망의 등대는 눈으로 감상하라고 자꾸 타일 의자에 붙들어 앉혔다. 구엘 의자에 앉아 멀리 등대를 내려다보니 덤으로 바다가 보였고 드넓은 광장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바다와 하얀 등대는 필터를 거쳐 나온 듯 눈부시게 고왔다. 빛의 산란이 빚어낸 푸르디 푸른 하늘과 바다 사이로 나타난 희디 흰 등대는 살풋 내려앉은 한 마리 학처럼 고고했다. 가까운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타일 의자에서 소망의 등대로 내려가는 계단에 구엘 공원의 도마뱀 분수대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옛 시간을 고스란히 베끼다 보니 달팽이 화장실일랑은 까맣게 잊은 채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빙빙 돌아 들어가야 출입문을 찾을 수 있었던 달팽이 화장실은 어디로 간 걸까? 외도가 아니었나?
섬 하나가 엮어 놓은 절경은 시선이 머무는 곳 그 어디나 명품이었다. 외도는 마치 지중해에서 똑 따다 앉힌 외딴섬인 양 낯선 듯 하다가도 익숙하게 다가왔다. 오리엔탈 룩처럼 개성이 흘렀고 뻘때추니 소녀처럼 활발한 기운도 넘쳤다. 두 번째 외도는 언뜻봐도 들쳐봐도 테라피였다. 안락한 시간에 기대어 바라본 광경은 후한 선물이었다. 외도의 지속적인 변신을 기대하며 돌아오는 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