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하다. 강하다. 해결사다. 불의에 대항하다. 자라면서 내 시선에 맺힌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도 참 예민한 여자였던 건 분명하다. 생각이 많아 잠도 잘 못 자고, 소화불량으로 쑥뜸기를 달고 살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경우에 어긋난 일이라면 어떻게든 바로잡았다. 간교한 이속으로 덤터기 씌우려던 사람의 작당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진실을 증명하여 사과를 받는가 하면, 사회 초년생이던 외사촌 언니가 사기당한 원금에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받아내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온당하지 않은 것은 어떤 식으로든 명확하게 풀어냈다. 친척들은 사건, 사고가 터지면 무조건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럴 때마다 벌어진 상황은 완전 복구가 가능했다. 치열한 만큼 늘 성과가 따르는 걸 보며 자랐다.
녹록지 않은 친척이나 이웃 살피기도 잊지 않아 청소년기 내 방은 친척 언니들과 함께 사용해야 하는 공용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종교 생활을 시작하면서는 내 종교까지 엄마의 권한에 들어갔다. 성경에 경외심을 갖고 영적 기반을 다지기도 전에 성가대 및 반사 활동을 유도했던 엄마에게 반감이 들었지만 감정을 통제했다. 가족을 전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고 여기면서 침범한 자유를 거역하지 않았다.
집안의 경제권을 쥔 채 살림을 일으켰고 자식의 교육을 위해 변두리지만 서울행을 선택했던 엄마다. 해야겠다고 맘먹으면 장기 계획이든 단기 계획이든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결과물을 보였다. 자그마하고 여린 여성의 강인함은 자신의 방식으로 끝도 없이 내달렸다. 딸의 입장에서 본 엄마는 카리스마로 무장한 작은 거인이었다. 엄마가 보여준 삶이 그르지 않았기에 간혹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살았다.
당차고 야무진 엄마의 강인함도 세월 앞에선 나약과 무기력으로 둔갑했다. 빠른 결정력이나 저돌적인 추진력은 오간데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부실한 나에게 상의하는 엄마가 되었다. 남과 비교하며 살지 말라던 소신 대신 남의 자식 얘기를 입에 올리며 부담을 주기도 했다. 엄마도 자신의 변화와 충돌하느라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엄마의 나약함은 돌아가시고 나서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엄마의 말이 적막하다는 의미였고 기대고 싶다는 뜻이었음을 살아계실 땐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엄마가 심은 강인한 여성상은 언제까지고 독야청청할 줄 착각했던 것이다.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고 보니 그 마음이 이해되면서 따라오는 건 안타까움뿐이다. 이제야 헤아리게 된 엄마 마음은 이미 세상 것이 아니어서 어떤 위로도 건넬 수가 없다.
부족했던 부분이 속속 드러날 때마다 '내 아이들도 마친가지겠구나, 온전히 나를 이해할 순 없겠구나, 수긍은 할지 몰라도 본심을 제대로 알아차린 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 닿았다. 부모와 자녀는 결국 완벽한 교집합을 이룰 수 없다는 데에 도달하니 서운해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럼에도 서운한 감정이 들 때가 있다는 것은 '나'여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결국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의 애로 사항을 그 나이가 되어보기 전엔 절대로 알 수 없겠구나, 절실히 알아가는 중이다.
같은 경험과 배경에 놓이기 전까지는 오롯이 한 사람을 이해하고 수용하기엔 역부족이다. 같은 경험이나 배경에 놓인 사람끼리도 신념이나 가치관이 다를 땐 같은 상황을 두고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 이해도 면에선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부모와 자식도 서로 다른 시기와 문화를 배경 삼았기 때문에 그때 형성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잖은가. 이해하겠다는 의지로 부모의 경험과 배경 속으로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기에 자녀는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으로 부모를 이해할 뿐이다. 뒤늦은 후회가 몰려올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우리가 인간의 한계, 역할의 차이에서 오는 후회를 줄여가려면 고민이 따라야 할 것 같다.
자녀가 성장할수록 부모는 서서히 표현 방식을 바꾸어간다. 이성적이고 교육적이기보다는 전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봐 달라고 한다. 간접적인 언어로 다가올 땐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그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할 때가 있다. 내가 엄마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부모도 자신감이 줄면서 초라하게 느껴지는 자신과 자주 접하다 보니 나 아닌 나에게 당황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신체적·정서적·사회적 변화 속에서 두려움도 엄습할 것이다. 강인했던 부모가 나약한 모습으로 다가오면 자녀는 낯설고 어색해 부모의 생각과 감정의 진심을 놓치기 십상이다.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낯설더라도 공감과 존중을 보내며 다가서는 노력이 필요할 듯싶다.
언제까지고 강인할 줄로만 믿었던 나의 불찰은 엄마도 기대고 싶고 기댈 줄 아는 여자란 사실을 놓치게 만들었다. 외로웠던 엄마의 삶에 심리적 지지를 보내지 못한 미안함이 불쑥 가슴을 죌 때면 마냥 송구하고 죄송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