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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따라 길따라

홍천 가는 길 3

by 오순미

느지막하게 일어나 '여유에 여유에 여유를 더해서' 아침 겸 점심을 준비했다. 어제 장볼 때 샀던 빵을 굽고 달달한 맥심 커피를 진하게 녹여 마셨다. 한 잔의 커피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갈 때 수타사를 들를까 남이섬을 갈까 갸웃거리다 남이섬에 점을 찍었다.




20년이 넘어 다시 찾는 거라 쫓을 기억이 없는 남이섬 정경이 궁금했다.


5분 남짓 타고 온 배에서 내리니 기와를 얹은 한옥풍 입구가 첫 인사를 건넸다. '남이섬 드날문'이라 쓴 우리말 현판이 정겨워 입속으로 소리내어 보았다. 드날문을 지나와 뒤돌아서서 나갈 때 다시 보자 한 번 더 눈길을 보냈다.


들어서자마자 뜬금없이 '깡타의 집' 타조 떼가 보여 생김새를 놓고 설왕설래 떠들어댔다. '꼬리가 올라갔네 쟨 내려갔네 저런 거 처음보네'하며 평가해도 타조는 들은 둥 만 둥 겅중거렸다. 품새가 '깡패 타조'다웠다. 거리낌없고 당당했다. 점점 마모되는 몸과 맘을 저들의 의식으로 코팅하고 싶었다.


호텔 정관루 옆 잔디밭 토끼도 지붕 위 공작도 호수 안 오리도 휑한 겨울을 무리지어 견디고 있었다. 철창없는 그들의 서식처가 자유해 보였다.


호수 안 오리 두 마리는 무리와 떨어져 얼음 위에 자릴 잡았는데 뭔가 수상쩍었다. 한 마리는 바짝 웅크린 몸으로 미동조차 없었고 곁에 선 한 마리는 두리번거리며 뭔가 알리려는 느낌이었다. 소리를 질러도 오리야 불러도 기척이 없었다. 우리와 옆에 섰던 다른 여행객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관리실에 알려야 할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 눈엔 웅크린 오리에게 문제가 생긴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곁에서 두리번거리는 오리처럼 우리도 관리실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때 여행객 중 한 분이 오리 근처에 나무조각을 떨어뜨려 소리를 일으키니 웅크렸던 오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어맛, 뭐야?이런!"

오리한테 속은 게 어이없어 괘씸죄를 물을까 했으나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먼저였는지 여행객들은 허허 웃으며 자리를 떴다.


앙상하고 싸늘했지만 군데군데 마련된 원형틀 안의 장작불은 손끝이 시릴쯤 맞닥뜨려 온기를 충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20년 전 욘사마 열풍을 일으킨 드라마 '겨울 연가(2002년 최초 한류 드라마)'의 흔적도 새록새록 다가왔다. 맹목적이며 이타적이었던 '준상과 유진의 첫사랑 이야기'를 재현한 조각상이 메타세쿼이아길 한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서로 마주보는 눈망울에 뚝뚝 떨어지는 연정이 고스란히 담긴 걸 보니 일본에서 신드롬을 일으키며 폭발적인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극 중 눈덮인 메타세쿼이야길은 남이섬의 상징이 되어 여인네들의 카메라를 쉼없이 터뜨렸다. 혼자도 찍고 같이도 찍고 점프도 하며 그 길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송파 은행나무길, 메타세쿼이아길, 잣나무길, 전나무 숲길 등 여러 가지 이름의 길이 있었지만 최상의 명칭으로 지목할 만한 길은 '대박나길'이었다.


올 한 해도 대박나기를 기대하며 동화적 포토존들을 지나노라니 '눈사람 호떡집'이 나왔다. 입장권에 포함된 거라 호떡을 주문했다. 커피도 들이켜고 싶은 맘 굴뚝이었지만 아점에 진하게 마신 맥심이 혈관을 돌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많은 양도 부담스러워 통과했다. 대신 '불멍' 여인네가 주문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 갈취해 목구멍에 따듯한 온기만 좀 채웠다. 빼앗은 커피가 맛있다더니 이 집 아메리카노도 내 취향이었다. '그린보드 카페'의 아메리카노 맛에 견줄 만했다. 신맛 쓴맛이 강하지 않으면서 구수한 게 부드럽고 깔끔했다. 입안을 향긋하게 가글한 느낌이랄까. 장작불이 타오르는 원형 화덕 앞에 블랙 마스크를 쓴 눈사람이 서 있던 그 집.

커피 맛집이었다.


흘러가는 시간에 맡긴 나를 찾을 생각 없이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다 맘에 드는 조형물이 나타나면 어슬렁어슬렁 다가가 눈여겨 보거나 셔터 한방 터뜨리며 남이섬에 여인의 지경을 넓혀나갔다. 소주병으로 장식한 조형물도 독특했고 건축물의 한쪽 벽면을 차지한 타일 빛깔도 멋스러웠다. 남이장대(전쟁 또는 군사훈련 시 군사 지휘를 위해 대장이 머무는 누대)와 자작나무 숲에서 한참을 머물다 하얀 풍선이 조명처럼 걸린 잣나무 숲길을 걷고 또 걸어 기교와 멋을 적절히 배합한 남이섬의 시간을 빠져나왔다.


남이섬 드날문 안녕~


집으로 가는 길에 들른 국밥집에서 따뜻한 국물로 몸을 토렴하는 중에 창밖으로 라테 거품같은 흰눈이 소담스럽게 내렸다. 따끈한 차 한 잔 마시며 말도 넋도 뺀 상태로 '눈멍'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풍경이었다. 하필이면 오늘 하필이면 지금, 이 국밥집에 들른 건 순전히 치명적인 경관을 보기 위한 예견된 순서 같았다. 다만 운전하고 가야할 여인의 귀갓길이 걱정됐지만 배테랑이니 마음을 좀 놓아도 될 싶었다.


소소한 일탈이지만 네 여자의 마음 안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위안이 담겼으리라 짐작한다.

'홍천 가는 길'이 살아낼 날들의 안티푸라민이 되기를 소망하며 눈내리는 창이 예쁜 국밥집을 천천히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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