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 교복시절 사복시절을 함께 그린 무리가 저물어가는 오월 끝자락에매달려 기어코 봄이 되었다.
초록이 넘실대는 화담숲에서 지워질 날 회상하며 나눈 화담도 덩달아 봄이 되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천 년 화담송이 기대해도 괜찮을 거라며 찡긋한다.
약속의 다리 건너 철쭉과 진달래가 진 자리에 초록잎이 빼곡하다. 차분차분 길을 따라가니 자작나무 숲에 이른다. 안심일랑 삼키고 근심일랑 뱉어내라 타이르는 숲의 소리를 들었던가? 스치는 사람마다 발걸음이 화사하다.
흰 살갗, 호리호리한 몸매에청초단아 고고함이 깃든 자작나무 숲 심장을 걸으며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만큼 깊은 호흡을 수없이 들이켠다. 근심의 더께가 자작자작 잦아드는 홀가분한 숲길이다.
참나무 그늘 아래 관중, 고사리, 고비가 자라는 양치 식물원을 지나자 소나무 정원이 근사하다. 굵은 가지 가는 가지 굽이굽이 뻗은 자태가 고귀하다. '자연적으로 꼬인 소나무'라는 팻말이 꽂힌 흑송도, 조경전문가의 손이 탄 적송도 굳은 절개와 곧은 기백을 품었다.
가지 끝 푸른 솔잎처럼
가늘어진 시간의 끝을
풀꽃으로 살아보는 건 어떠냐고 편지를 쓴다.
TO. 점점 작아지는 내 마음~
경사가 완만한 데크길을 사뿐사뿐 걸어 암석•하경 정원을 지나면 분재원에 다다른다. 기교와 배양 기술에 따라 다양한 형상을 품은 향나무, 단풍나무, 소사나무가 반긴다. 공들여 가꾼 흔적이 사방팔방에서 묻어나는 축소판 고목을 바라보노라면 광활한 자연미도 넘치고 빼어난 조형미도 풍긴다.
잘 다듬어진 작은 거장의 웅장한 매력에 빠져 가까이 들여다보니 내 뜻대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들린다.
수국원에 도착한 우리는 다양한 컬러에 탄성을 지른다. 토양의 성질에 따라 청색(산성)이나 붉은색(알카리성)을 띤다는 수국. 허리를 숙여 수국과 눈맞추던 여인이 입을 연다.
-이렇게 이쁜데 꽃말이 왜 변덕, 변심일까?
=토양에 따라 색이 변해서 변덕쟁인가?
-어라, 진실한 사랑이란 꽃말도 있네.
=이쁘니까 진실한 사랑인 걸루.
-수국이랑 닮은 불두화도 이쁘더라.
=불두화?
전통 담장길에 야구공만한 불두화가 동글동글 하얗게 피었다.
어릴 적 앞마당을 차지했던 펌프가 세월을 건너 화담숲에 머문다. 누군가의 수고로 함치르르 광택도는 검은 빛이 수려하다. 손아귀에 힘을 주어 펌프질에 열중하니 맑은 물이 좌라락 우물 안으로 떨어진다. 시름도 아픈 기억도맑은 물따라 떠나간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처럼 야물딱진 두레박이 다소곳하다. 두어 두레박 길어올려 여름이올 길목을 식혀두라고 떠나갈 봄이 재촉한다.
우아한 초록이 배어든 원앙 연못.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원앙 대신 소리없이 다가온 잉어 떼가 푸른 봄 위에 쨍한 오렌지빛을 갈긴다.
연못가 차지한번지 없는 주막이 고풍스럽다. 언뜻 광한루가 스친다. 판소리를 열창하는 국악인의 구성진 가락이 들릴 듯하다.
길 잃고 헤매던 물이 목적지에 당도하도록 기꺼이 자신을바친 나뭇가지의 헌신이 선한 사마리아인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