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채널을 돌리다 미술사학자이며 답사와 여행 전문가 유홍준 교수의 모습이 스쳤다.무슨 내용일까 궁금해 고정했더니 '차이나는 클라스-인생수업'이라는 프로그램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여행 이야기 중이었던 것 같은데 방송 끝부분이라 아쉬웠지만 하루 코스 여행 팁을 얻는 쾌거를 건졌다. 부담스럽지 않으니 설 휴가 때 남편이랑 다녀와야겠다고 맘먹으며 다섯군데를 서둘러 메모판에 적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설 휴가 중에 서산엘 다녀오자고 했다.
"혹시 유홍준 교수 프로그램 봤어?"
그렇다고 했다. 30년 살아낸 부부의 이심전심은바로 날을 잡고 장소를 읊었다.
유홍준 교수가 가르쳐준 순서대로 가기 위해 제일 먼저 '추사 고택(김정희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으로 내비를 찍었다. 평일이어서 도로가 붐비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그날이 입춘임을 알려주자 남편은 몇 차례 꽃샘 주위만 겪으면 겨울도 물러가겠다고 말했다.
입춘이었던 그날은 하루종일 영하의 날씨에다 바람따라 날리는 눈발이 거세 다니는 내내 털모자가 요긴하게 쓰였다.
예산군 용궁리에 도착하니 '추사 기념관'과 '추사 체험관'은 휴관한다는 안내문이 먼저 방문객을 맞았다. 멀리서 온 여행객에게는 아쉬움이 컸지만 아마도 코로나 영향이 크지 싶었다.
고택을 향해 가는 중에 '세한도'가 새겨진 비석이 보였다. 자세히 보아야 볼 수 있다. 추사 시비로 보이는 글씨 밑에 소심하게 음각으로 파낸 그림이라 쓰윽 지나가면 스칠 수 있다. '세한도(歲寒圖-국보 제 180호)'는 조선 헌종 때 제주도에 유배 중(1840~1848)이었던 추사가 58세(1844)되던 해에 그린 그림이다. 기교없이 간결하게 구성한 '세한도'는 극도의 절제를 표현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화로 평가받고 있단다. 귀양 간 스승을 잊지 않고 연경(지금의 북경)에서도 얻기 어려운 귀한 서책을 구해와 청나라 최신 학문과 동향을 전해준 제자 '이상적(중국어 통역관)'의 성품을 소나무와 측백나무에 비유해 답례로 준 그림이다. 고난과 역경에 처했을 때 곁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될 동무임에 틀림없다. 추사에게 이상적이 그랬던 것처럼…
석축 위에 설치된 솟을대문에서 추사 김정희 일가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햇살이 빽빽하게 들어찬 사랑채가 찬바람에도 봄을 머금고 있었다. 앙상한 가지마다 곧 꽃망울을 터뜨릴 것처럼 구석구석 해를 들인 사랑채는 그늘 한 점 허락하지 않을 기세였다.
정원 앞 석주는 추사가 직접 제작했다는데 해 그림자가 늘어지는 방향을 보며 시간을 추정하는 해시계로 활용됐단다. 실학자다운 추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돌기둥이었다.
사랑채 기둥마다 주련이 걸려 있으나 오래돼 보이진 않았다. 사랑채 주련은 시나 자작품을 거는 것이 보통이라니 짐작하건대 김정희의 작품일 텐데 해석이 불가해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해설사의 부재가 안타까운 시점이었다.
사랑채와 구분되어 있는 안채로 들어가니 'ㅁ'자 하늘이 구름 한 점 걸리지 않은 게 파란 옥스퍼드 같았다. 트인 곳은 없으나 하늘가에서 내려오는 빛이 사방을 밝게 비추니 마루며 방이며 옹주의 옛 숨결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안채는 왕실 가족인 화순옹주(영조의 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가 살았던 곳으로 그녀를 배려해 궁궐 내 한옥 형식으로 지은 것이어서 부엌은 별도로 두지 않고 아궁이만 놓여 있었다. 마루에 앉아 바라본 중문은 사랑채 담장(유교적 윤리관념에 따라 안채와 사랑채 엄격히 구분)으로 막혀 있었으나 하늘가에서 들이고 창가로 스미는 햇빛이 두드러지게 밝아 답답해 보이지는 않았다. 정갈하고 따뜻한 안채에서 검약하고 유순했다던 화순옹주의 성품이 묻어났다.
안채를 나와 뒷편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자 추사 영당이 나왔다. 영당에는 대례복을 입은 추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체구에 비해 얼굴이 작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모습에서 후덕한 인품이 배어 나왔다. 점잖은 학자 스타일이다.
추사를 대면하고 내려오는 고택 뒤뜰이 예술이었다. 왼편의 나지막한 돌담은 엄격한 가옥 관념에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했다. 오른편엔 안채와 사랑채의 뒤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기와 지붕 위를 하얗게 덮은 겨울 눈, 마당을 덮은 흰눈 위에 오뚝하게 솟은 굴뚝, 방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작은 툇마루가 걸작이었다. 방문을 열어 흘러가는 계절을 낚고 툇마루에 앉아 시름을 잊었던 화순옹주가 그려졌다. 사랑채와 안채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고는 하나 이곳 툇마루는 안채의 중문을 거치지 않고도 여인네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에 '월성위 김한신(추사의 증조부. 영조의 부마)과 화순옹주'가 연모의 정을 나눌 수 있었던 낭만적인 공간이지 않았을까? 감히 넘겨짚어 보았다. 동갑내기 어린 부부는 '어진 부마 착한 옹주'라는 닉네임으로 조선시대 보기 드문 달달한 커플이었다고 하니 그들의 사랑은 아마도 이 툇마루에서 무르익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낮은 돌담 위로 솟은 풍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차 한 잔 마시기 적당한 뒤뜰 툇마루를 고택의 하이라이트로 꼽으며 영당을 내려왔다.
주변에 추사 묘역, 월성위 묘역,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 천연기념물 백송, 가문 대대로 이용해온 우물터가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었다.
두 번째 여행지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으로 출발했다. 계단은 가팔랐지만 한숨 두숨 쉴 때마다 청정한 공기가 마스크를 뚫고 폐부를 정화하는 듯했다. 무릎이 신통치 않아 목재 난간을 붙들고 헥헥 올라갔다. 관리사무소를 지나 불이문 문턱을 넘어서 또 한 번 계단을 오르니 드디어 마애불이 자애로운 미소로 맞아주었다.
'서산 마애불( 자연 암벽에 새긴 불상, 국보 제84호)'은 중앙에 '여래(진리의 세계에서온 분)입상', 우측에 '미륵반가사유상', 좌측에 '제화갈라보살입상'으로 이루어진 백제 말 화강석 불상이란다. 빛의 각도에 따라 부처의 미소가 달리 보인다는데 내가 갔을 땐 쭈뼛쭈뼛 그늘이 드리웠던지라 빛 때문에 달리 보이는 미소를 느낄 수 없었다. 아침엔 살짝 띈 미소이고, 저녁엔 입꼬리가 올라가 활짝 웃는다는데 난 정오에 보아서 그 중간쯤의 미소를 봤다고 해야겠다. 아무렴 어떠랴. 천 년도 넘은 옛 '백제의 미소'를 보았다는 것만으로 흡족할 뿐 아니라 보는 이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를 텐테 굳이 아침과 저녁으로 달리 보인다는 데에 묶일 필요는 없을성 싶었다. 부처로서 근엄하다기 보다는 할아버지가 손주를 바라보며 푸근하게 웃어주는 서민적인 인상에 더 가까웠다.
석굴암이나 장경판전은 우리 민족의 과학적 지혜가 돋보이는 문화재다. 서산 마애불의 미소와 그 미소가 새겨진 화강암의 각도에서도 석공의 슬기와 공력을 엿볼 수 있었다. 화강암 자체가 수직이 아니라 80도로 기울어져 눈이나 비로부터 마애불을 보호할 수 있단다. 불상도 드러내야지 각도에 맞게 바위도 깎아야지 석공의 정성과 기울인 수고가 고스란히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