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마애불을 내려와 '보원사 폐사터(백제시대 창건, 통일신라~고려 초에 융성했을것으로 추정)'로 향했다. 내비가 안내한 곳에 차를 세우고 몇 걸음 발을 떼니 마주오던 비구니스님께서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가 그날의 날씨처럼 청아했다. 우리도 덩달아 마음이 밝아졌다.
사찰이라면 속세와는 거리를 둔 산중에 자리잡는 것이 보편적이나 보원사 폐사터는 접근하기 편한 길가에 위치해 있었다. 임시 법당으로 보이는 건물 처마 끝에 저마다 크기가 다른 고드름이 도열한 걸 보며 감히 마애불의 미소를 따라해보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해 겨드랑이가 움찔거렸지만 겨울 풍경을 해치고 싶지 않아 찰칵 저장만 했다.
귀퉁이에 임시 법당을 품은 보원사 빈 터는 드넓은 광장이었다. 번영기의 웅장했던 규모가 짐작되고도 남을 만한 폐사지였다. 누렇게 뜬 잔디 위에 희끗희끗 깔린 눈이폐허가 된 사찰의 시름같아 쓸쓸해 보였지만 관리가 되고 있다는 인상이 역력했다. 보통 폐사터라면 질서없이 박힌 돌부리들이 널려있고 잡초가 무심하게 자랐어야 하는데 보원사 잔디는 '이태원 클라스(드라마)'의 '박새로이'헤어처럼 단정했다. 임시 법당 근처에 발굴 조사하면서 모아 놓은 주춧돌이나 석재들도 가지런히 줄지어 세상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좌측에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어 우리가 옆구리로 입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입구에 '당간지주'와 '석조(사찰에서 사용할 물을 받아 두는 용도로 쓰임, 직사각 욕조와 닮은 모양)', 중앙에 '보원사지 5층 석탑', 석탑 뒤로 산자락에 쌓은 축대 아래 '법인국사보승탑'과 '보승탑비' 등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남아 있었다.
'당간지주'는 주로 사찰 입구에 세워 당(불화를 그린 깃발)을 건 당간을 지탱하는 구조물로 석재나 금속 등으로 제작한단다. 폐사지의 석당간지주는 사찰의규모에 비해 간결하고 단아했다. 권력과 비리를 비껴간 사찰이었음을 화려하지 않은 당간지주가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보원사지 5층 석탑'이 중앙에 버티어 서서 무너진 절터의 자취를 끝내 지키고 빛냈다.
'법인'은 국왕이 내린 탄문스님의 시호, '보승'은 사리탑의 이름으로 고려 4대 임금 광종이 자신의 불사에 힘을 기울인 고탄문(법인국사 속명)에게 왕사에 이어 국사로 책봉해 보원사로 보냈단다. '법인국사보승탑(법인국사 사리 안치)'과 '보승탑비(법인국사생애 기록)'는 의연하게 보원사를 내려다보며 다시 맞을 번성기를 기대하는 듯했다.
폐사터의 재건을 고대하며 서산 '개심사(開心寺-백제 의자왕때 혜감국사 창건)'로 넘어갔다. 마음을 열고 올라가는 건지 올라가봐야 마음이 열리는 건지 알 수 없어 편하게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이왕이면 자동차가 오를 수 있는 곳까지 가고 싶어 길을 찾았으나 '여기서부터 차량 출입금지'라고 써 있어 할 수 없이 되돌아 나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소박한 토산품이 쌓인 동네 장터에 눈길을 주다보니 '상왕산 개심사'라 쓰인 일주문이 나왔다. 3~4분 더 오르니 '세심동(洗心洞)’과 '개심사 입구'라 쓰인 표지석 뒤로 계단이 보였다.
먼저 마음을 씻고 올라가는 것이 약속인 듯하여 숨 한번 크게 들이쉬어 맑은 공기로 갈아마신 뒤 첫 발을 내딛었다. 숨이 차올랐다. 이쯤이면 도착이려니 싶어 고개를 돌리니 허걱, 다시 출발선에 선 것 같았다. 무릎이 부실해 계단을 기피하는 중인데 산 언덕이 온통 계단이어서 버거웠다. 헉헉! 헥헥! 짧은 호흡에 때묻지 않은 산소가 힘을 보탰지만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이산화탄소를 힘껏 뿜으며 개심사에 도착했다.
'우왓, 이곳에 주차한 차량은 뭐람?'
약올랐지만 규칙을 지킨 올곧은 맘을 스스로 칭찬하며 풍경 소리를 따라갔다.
오른편으로 연못 위 외나무 다리와 돌담 위 앙상한 배롱나무가 꽁꽁 얼어 붙은 연못 안 외딴섬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모습이 마음에 와 박혔다. 나도 그 풍경 속 풍경이고 싶어 외나무 다리 위에 한껏 팔벌리고 서서 오늘이 입춘이라고 외딴섬에 귀띔했다.
연못을 두고 얕은 언덕을 오르니 '범종각' 처마의 풍경 소리가 귓가를 감쌌다. 바람결에 굴복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소리만큼은 뜻을 굽히지 않아 맑고 고아했다. 계단을 오르느라 열린 마음이 닫힐 뻔한 걸 풍경 소리가 꿰뚫어 다시 열었다.
사찰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모자라지도 않았다. 안양루를 끼고 우측 해탈문으로 들어가니 경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에 대웅전이 보이고 개심사 5층 석탑이 세월을 품은 채 굳건하게 서 있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투박하지도 않고 날렵하지 않지만 둔하지도 않은 석탑에서 백성들의 근심을 뚝딱 해결해 주었을 믿음직함이 엿보였다.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대웅전 앞 'ㄷ'자형 철제 구조물이 거슬리는 게 좀 아쉬웠다. 안양루에서 바라본 좌측은 '심검당'이라하여 요사채(스님들의 생활 공간)로 사용하는 건물이고, 우측은 '무량수각(스님들이 기거하는 승방으로 사용 중)'이었다.
'심검당'은 개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는데 단청이 없는 대신 기둥이 독보적이었다. 제멋대로 휜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 기둥이 나무결을 따라 죽죽 갈라져 벌어진 틈새로 흘러간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심검당'의 배흘림 기둥을 처음 보았을 땐 보수 비용이 부족한가 싶었는데 '심검당'을 거쳐 '무량수각'까지 눈에 담고 보니 휘고 갈라진 기둥 모양이 개심사만의 독특한 양식이구나를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보니 벽의 형상도 기둥 모양을 따라 곡선으로 흘러갔다. 특히 '무량수각' 측면의 기둥은 휘고 갈라진 정도가 가엾기까지 했으나 예술적 정취가 담긴 오래 전 창작물로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계단은 도저히 무리일 듯하여 차로 올라오려다 거절당했던 구불구불 시골길로 내려와 '간월암'으로 향했다. 몇 년 전에 갔던 곳이라 건너뛸까 하다가 숙제 다 해놓고 책가방에 챙기지 못해 벌받은 날처럼 개운하지 않아 마지막 코스까지 둘러보기로 했다.
물 때에 따라 뭍이 되기도 하고 섬으로도 만날 수 있는 '간월암'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무학대사(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창건한 암자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려다보니 바닷길이 열려 있었다. 선택받은 사람이 된 듯 어깨가 올라갔다. 열린 길을 따라 아담한 경내로 들어가 산신각, 관음전을 둘러 보았다. 관음전 처마에서 흔들리는 풍경소리가 바닷바람에 묻히기도 바닷바람을 뚫기도 하여 간간히 들렸다. 해 밝은 지붕 위와 그늘진 지붕 아래가 대비되어 왠지 신성해 보이는 일주문에 서서 바라본 바다의 둥근 선이 마음을 다독였다. 드넓은 바다에서 거친 바람이 훅훅 불어와 숨이 멋을 것 같았지만 머리를 쨍하게 씻어주기에 그 바람을 그대로 들이켰다. 가슴에서 뽀글뽀글 탄산이 올라오는 듯했다.
시간이 촉박할까봐 부랴부랴 다녔는데 여유를 갖고 다녀도될 만한 여행이었다. 백제부터 조선까지 우리의 역사와 문화, 곁에 어우러진 자연까지 들일 수 있는 여정이므로 겨울도 좋지만 살랑바람 불고 꽃빛깔이 흐드러질 때 떠나는 건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