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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그라든 몸 펴주는 요리, 뜨더국

이른 추위를 훈훈하게 감싸 줄 수제비

by 오순미

창 밖에 이는 바람 한 점마다 터뜨리는 비명이 예사롭지 않다. 가을이다 싶었는데 어느새 지려나 쌀쌀한 바람이 목덜미를 후벼 판다. 귀한 가을이 머물 새도 없이 초겨울이 닥친 듯하여 몸이 움츠러든다. 오그라든 몸을 펴고 도둑맞은 가을을 보상받기 위해 쫀득하고 뜨끈한 수제비를 끓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수제비를 좋아했다. 황해도가 고향인 아버지는 찬바람이 불면 '뜨더국'이나 끓여 먹자고 했다. 아버지 고향에선 수제비를 '뜨더국'이라 불렀다는데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뜯어 넣는다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 것 같다.


아버지가 좋아했던 황해도식은 멸치나 북어대가리로 육수를 낸 후 파, 마늘, 간장으로 간을 한 맑은 국물 수제비다. 반죽은 얇게 뜯어야 육수 맛이 잘 배고 식감도 부드럽다며 최대한 얄팍한 수제비를 원했다. 뿐만 아니라 수제비 한술에 입안이 꽉 찰 만큼 큼직하게 뜯어 넣는 걸 좋아했다.


반면 엄마 고향 강원도식은 반죽이 좀 도톰한 데다 한입 크기로 뜯어 넣는 게 특징이었다. 아버지가 워낙 얇게 뜯은 수제비를 좋아해서 우리 집 수제비 반죽은 대체로 황해도식으로 뜯었다. 대신 국물은 강원도식으로 감자, 호박, 양파, 당근 따위를 넣고 푹 끓이다 보니 걸쭉하고 구수했다.


어린 나는 수제비 국물에 들어간 감자를 더 좋아했다. 국물에 감자를 으깨 수프처럼 먹었더라면 별미였을 텐데 그땐 그걸 몰랐다. 아버지는 반죽만 얄팍하면 국물은 어떤 방식이어도 개의치 않았다. 결국 우리 집 수제비는 황해도와 강원도가 손에 손 맞잡은 인연의 새 맛이었다.



수제비는 조선시대 상류층 음식


오랜 세월을 거쳐 생활 음식이 된 수제비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밀가루가 귀해서 궁중이나 부유층의 특별 음식으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엔 수제비를 '운두병'이라 불렀는데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년 '이용기'가 쓴 조선 요리 모음집)>에 기록된 조리법을 보면 닭 육수에 다진 고기까지 사용했다는 데서 상류층 음식임을 짐작할 수 있다(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구름머리처럼 하얗게 뜬 반죽 조각'이라는 의미의 '운두병(雲頭餠)'이란 이름만으로도 수제비가 흔하지 않은 음식이었다는 걸 예상할 수 있다. 한자식 표현이라든지 '구름'이라는 시적이며 은유적인 비유를 사용한 명칭도 그렇고, '병(餠)'이 붙은 이름은 주로 연회나 제례 요리명에 많았기 때문에 양반가나 글 읽는 문인층에서 즐긴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신 메밀과 보리 같은 잡곡 수제비는 서민들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국수처럼 밀지 않아 간편하고 재료가 단순하며 한 끼 식사로도 충분해 쌀이 귀한 시절엔 수제비가 서민 밥상에 자주 올랐다. 6.25 전쟁 이후 대량의 밀가루가 구호물자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수제비는 값싸고 든든한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요즘 수제비는 지역마다 자기만의 색깔로 발전했다. 지역 특산물 · 반죽 재료 · 국물 재료에 따라 감자 수제비, 바지락 수제비, 들깨 수제비, 다슬기 수제비, 보리 수제비 등 다양한 향토 음식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강원도 감자옹심이(감자녹말)와 상실운두병(도토릿가루), 제주도 메밀저배기(메밀가루) 등이 지역에서 흔한 재료로 만든 수제비 종류다.



찬바람 핑계로 끓인 뜨끈한 김치 수제비


찬바람을 핑계로 쫀득하고 뜨끈하게 끓인 나만의 수제비는 김치 수제비다. 맑은 멸치 국물도 담백하고 깔끔하지만 얼큰하게 끓인 김치 수제비가 짧은 가을을 달래기에 제격일 것 같았다.


수제비 반죽은 맹물보다 소금물이 낫다. 적당한 간이 밸 뿐만 아니라 글루텐(밀 단백질 결합망) 형성을 도와 퍼지지 않고 쫄깃한 반죽이 되기 때문이다. 맛은 담백해지고 점착성은 낮아져 수제비 뜰 때 손에 덜 달라붙어 효과적이다. 충분하게 숙성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끓는 물에서도 잘 풀리지 않고 탱탱하게 익으므로 미리 반죽해 두는 것이 쫀득한 수제비를 끓이는 비법이다.


진하고 구수한 맛을 내기 위해 멸치와 다시마를 듬뿍 넣고 국물 먼저 우렸다. 팔팔 끓는 국물만 보아도 몸이 훈훈해지는 느낌이다. 여기에 김치 국물과 고춧가루, 고추장, 손가락 크기로 썬 김치 한 줌, 마늘을 넣고 얼큰하게 좀 더 끓였다. 냉장고에서 숙성한 밀가루 반죽을 꺼내 끓는 육수에 뜯어 넣기 시작했다. 하얀 구름처럼 동동 떠오르는 수제비에 침이 고였다.


▲쌀쌀한 날에 끓였던 김치 수제비. 김치와 김치 국물을 넣어 칼칼하고 시원한 맛이다.


어려선 아버지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끓여준 수제비를 먹었지만 내가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후로는 얄팍하게 뜯기가 어려워 도톰하게 뜯었더니 그게 더 입맛에 맞았다. 크기도 숟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작게 뜯는 수제비가 먹기 편해서 나만의 수제비는 작고 도톰한 편이다.


여기에 호박, 감자 등 갖은 야채는 기본이고 어묵이나 콩나물, 버섯, 부추 등 남은 식재료가 있다면 같이 넣어 끓인다. 마지막에 계란도 풀어 넣고 김가루까지 뿌리면 푸짐한 수제비 완성이다. 수제비보다 칼국수를 더 좋아하는 남편도 국물이 시원하다며 숟가락이 바쁘게 들락거린다.


한때 값싸고 든든해 국민 음식이었던 수제비가 예전만큼 환영받지 못한다. 건강을 중시하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덜 반가운 음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밀가루의 주성분인 글루텐에 민감한 사람들은 소화 장애나 복부 팽만감, 피로감을 유발해 '글루텐 프리 식단' 붐이 일기도 했다. 고탄수화물 식품이다 보니 체중 증가 및 혈당 급상승을 초래해 맛있지만 몸엔 무겁다는 인식도 확산되어 밀 대신 국산 곡물 선택 비중이 증가하는 추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 아버지처럼 수제비 생각이 간절할 때가 있다. 손으로 반죽해 뜯어 만든 수제비 한 그릇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후후 불며 떠먹던 따뜻한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소진되어 빠른 충전이 필요할 때 뜨끈한 수제비 한 그릇은 여전히 가치 있는 음식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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