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팔 벌려 안은 형상, 경이롭다

구불구불한 물길 따라 느긋하게 걷는 예천 회룡포

by 오순미
▲전망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마을 전경. 내성천이 휘돌아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경북 안동과 문경 사이에 있는 예천은 유교 문화가 뿌리내린 지역으로 고택과 서원에서 선비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고장이다. 전형적인 내륙 지형인 예천은 강이 스스로 길을 낸 내성천이 자연 하천으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스러운 곡류와 모래톱으로 형성된 내성천은 관광지로도 인기가 높다.


내성천 모래톱과 곡류가 이룬 멋진 자연 경관이 바로 육지 속 섬마을 '회룡포(국가명승지 제16호)'다. '용이 돌아나가는 곳'이란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하늘에서 본 내성천은 용이 회전하여 승천하는 모양을 이루었다고 한다. 회룡포가 한눈에 보이는 회룡대로 가기 위해 지난해 12월 28일 예천군 지보면으로 출발했다.


회룡포 전망대는 장안사를 거쳐가야 하므로 일주문 지나 사찰 바로 아래 주차했다. 규모는 작아도 붐비지 않아 편하게 주차할 수 있었다. 거기서 조금 오르면 바로 장안사 범종루가 보인다. 장안사를 두고 2~3분 더 오르면 용왕각과 아미타 부처가 나오고 우측으로 회룡대 가는 긴 계단이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아 주눅이 들었지만 나릿나릿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끝에 올라서니 계단 수를 세었냐 묻고 223개라며 친절히 알려 주는 표지판이 나온다. 에너지 고갈 수준의 개수지만 무릎 부실한 내게도 전혀 어렵지 않을 만큼 낮은 계단이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서 4~5분 정도 걸으면 회룡대 도착이다.



발소리 선명히 들리는 고요한 마을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는 아늑하고 경이로운 풍경이다. 태백산 자락이 둘러싸고 모래톱이 두 팔 벌려 꽉 안은 형상은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과 같은 모습이다. 모래톱이 350도 에워쌌지만 결코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복잡한 일이 싹 정리되어 홀가분해졌을 때'와 같은 평온한 공간으로 보인다.


겨울이라는 계절 특성상 여행객은 우리 부부 외 두 명을 더한 소수. 넷 모두 한가로운 그 자리를 쉽게 뜨지 않았다. 넓지 않은 전망대에서 위치를 옮기며 회룡포 구석구석에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멀리서만 볼 게 아니라 마을 안으로 직접 들어가 회룡포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보자고 말했다. 회룡대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제1뿅뿅다리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지만 장안사에도 들러야 하고 오후엔 안동 월영교에도 가야 해서 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예천 용궁면 회룡포 마을의 제2뿅뿅다리


회룡포 마을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디디는 발자국 소리가 선명할 정도로 조용한 마을이었다. 파란 대문 집 앞엔 말린 나물류와 콩을 소포장하여 탁자에 올려놓고 무인 판매라 써 붙여 놓았다. 햇빛에 바래고 비에 젖을까 염려되어 우산을 씌운 모습이 정성스럽고 정겨웠다.


마을을 지나 모래톱이 보였을 때 그 규모에 꽤 놀랐다. 회룡대에서 바라보았던 것보다 상당히 넓은 모래밭이었다. 제1뿅뿅다리에서 제2뿅뿅다리까지 1.2km나 되는 백사장을 맨발 걷기 해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봄이나 가을이라면 천천히 걸으며 건강한 시간을 가져도 좋을 법하다.


뿅뿅다리는 영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와 같은 분위기다. 원래 여기도 외나무다리였으나 수해 문제 때문에 강철관과 구멍 뚫린 철발판(아나방)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뿅뿅다리는 주민과 여행자의 보행로로 단순하게 만들어 회룡포의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강의 흐름을 존중하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응집된 상징물로 보였다. 때문에 실용적인 구조물이라기보다 조심하는 마음을 배우기 좋은 다리 같았다.


▲뿅뿅다리는 강철관과 철발판으로 만든 단순한 보행로


자연에 순응하는 낮은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자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넓지 않은 다리 폭, 구멍이 숭숭 뚫린 철발판, 흐르는 강물에 영향을 받아선지 속도에 연연하기 보다 균형 잡고 천천히 걷게 되었다. 구불구불한 물길을 펴고 바꾸는 정비 공사로 회룡포와 같은 모래톱이 수장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뿅뿅다리를 건넜다.


가느다란 눈발을 맞으며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길이 여유로웠다. 사락사락 옷자락에 부딪는 눈발 소리마저도 경쾌했다. 조용한 마을의 정적을 깨는 개 짖는 소리가 우릴 환영하듯 값지게 들렸다. 살아 움직이는 소리가 어찌나 반가운지 찾아 인사하고 싶었다.



가벼워진 마음 하나면 족한 여행


이번 여행은 문경에서 시작된 터라 하루 안에 예천과 안동을 오가는 길이 버겁지 않았다. 점심은 남편이 근무 중에 몇 번 가보았던 쌈밥집에서 먹자고 했다. 직접 키워 제공하는 곳이라 쌈채소가 신선하다며 내비게이션을 작동했다. 남편은 무엇이든 잘 먹는 식성이라 맛있다는 기준이 나와 다르다. 더구나 쌈밥이 맛있어야 도긴개긴이지 싶어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정갈한 식당 분위기는 맘에 들었다. 쌈채소는 셀프바에서 먹고 싶은 만큼 가져갈 수 있도록 준비돼 있었다. 남편이 담아 온 쌈채소 양이 지나치게 많다 싶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모조리 해치웠다. 직접 농사지은 쌈채소라 그런지 비할 데 없이 싱싱했다. 밭에서 갓 따온 것처럼 수분기가 넉넉해 탱글거렸다. 10가지나 되는 종류는 이름마저 낯설었다. 오크·적치콘·다정채·뉴그린·적세엽 등 셀프바에 매단 채소 카드를 보며 이름·모양·효능을 참고할 수 있었다.


▲쌈밥집에서 먹은 정갈한 점심 한상


밑반찬으로 나온 고사리나물, 무나물, 고구마 조림, 꽈리고추 조림은 익힘 정도, 간, 감칠맛 모두 야무졌다. 거기에 으깬 두부를 넣은 우렁 강된장은 대놓고 잽을 날려 혀가 놀랄 맛이었다. 강된장은 짭조름한 맛이 일반적이나 그곳은 고소하고 삼삼한 게 맨입에도 짜지 않았다. 그 된장으로 끓였을 찌개 역시 깊은 맛이 우러났다. 돼지고기는 불향이 나면서 부드러워 쌈채소, 강된장과 합을 이뤘다. 친숙한 음식이지만 합리적인 가격에 편안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던 쌈밥은 소소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더한 한 끼였다.


젊어서 여행이 새로운 걸 찾는 거라면 중장년의 여행은 다녀온 후 가벼워진 마음 하나면 그걸로 족하다. 편한 잠, 입에 맞는 먹거리, 빽빽하지 않은 일정, 서두르지 않는 마음이었다면 충분히 잘 다녀온 여행이다. 예천 회룡포와 안동 월영교에서 보낸 느슨한 하루가 그랬다. 향기로운 꽃도 붉은 단풍도 사라져 스산하지만 겨울 여행은 오히려 속도를 낮추는 여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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