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 가다

낯선 듯 익숙한 듯

by 오순미

나무랄 데 없는 봄날이 머리칼을 헝클어 눈을 가린다.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봄, 너니까 참는다고 웃음으로 흘긴다.


시청역 4번 출구, 봄바람이 달다. 보사노바 리듬처럼 경쾌하고 부드러워 꽁꽁 싸맸던 목덜미를 훤히 다 내주어도 후회없다.


저만치서 느긋하게 다가오는 종로11 마을 버스.

와 이리 늦노?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어슬렁거려도 재촉하지 않고 훈계하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봄바람 때문이다.


종로11 마을 버스를 타고 가 내린 곳은 정독 도서관 앞. 국립현대미술관을 향해 사부자기 걷는다.

어랏, 티켓박스에 웨이팅이 없네

곧바로 무료 입장권을 얻어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한국미술명작>으로 향한다.

그럼 그렇지. 잠깐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찰나다.

40분 가량 기다려 드디어 입장이다.


치열했던 온라인 예매 경쟁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어 궁금증만 더하던 차에 전시 연장 및 일인 일매 현장 발권으로 조정되어 다녀온 <이건희 컬렉션>


수용과 변화, 개성의 발현, 정착과 모색 세 개의 주제로 나뉘어 전시된 우리 나라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대표 미술관을 들러보는데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면서 정작 내 나라 화가들엔 누가 있는지, 어떤 작품이 있는지 지평선 너머 풍경처럼 보이지 않으니 궁금해하지도 않은 사람 중 하나로 살았다.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천경자 정도의 이름은 교과서나 뉴스를 통해 접하긴 했으나 작품을 볼 기회는 드물었다. 고흐나 모네가 익숙한 것처럼 우리 화가들도 낯섦 뒤에 방치되지 않기를 바라는 맘으로 발걸음하게 되었다.


장욱진의 <공기놀이-1938>는 화가로 입문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들어준 초기 작품이다.

가족의 시중을 들던 여인들이 노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는 설명을 읽고 나서 다시 보니 장욱진 집안의 인품까지 보이는 듯했다. 부리는 사람이지만 다그치지 않은 점, 소녀의 감성을 인정하고 배려한 점이 훈훈하게 다가온다. 동생을 돌보면서도 놀이에 참여하고픈 누나(언니)의 마음이 애처롭다. 어쩌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새고 만족스러운지도 모를 일이다.


장욱진의 <나룻배-1951>는 전쟁기를 보낸 고향에서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나무판 위에 그린 <소녀-1939>라는 작품의 뒷면에 그린 것으로 어린 시절 강나루 풍경이란다. 전쟁 중에 캔버스를 구할 수 없었던 작가들은 기존 작품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며 예술혼의 맥을 이어갔다고 한다.


작품에서는 전쟁 중 무기력이 읽히지 않는다. 색감도 우중충하지 않다. 푸르른 강물은 전쟁이 곧 끝날 거라는 기대감으로 보인다.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가진 짐을 배 위에 부리지 않은 채 안고 지고 있는 모습에서 단종 유배지 청령포로 가는 뱃길이 떠올랐다. 채 5분을 넘지 않았던 짧은 뱃길. 이 곳도 타자마자 곧 내릴 거리라 짐을 그대로 이고 안은 채 서 있나 보다.

소년은 처음 가져보는 자전거에 눈을 떼지 못한 채 혹여라도 잃게 될까 두려운 마음 담아 두 손 가득 힘을 줘 꼭 쥐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사랑스럽다.

가장 먼저 태운 소는 누굴 따라 갈 것인지 궁금하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년대>는 규모가 놀라웠다. 전시장 벽면 하나를 통째로 차지했다.

언제부턴가 항아리에서 정서적 위안이 풍긴다는 걸 느낀다.

산사원(포천 전통술박물관)넓은 뜰에 줄지어 선 항아리,

이화원(가평 실내 정원 나인포레스트 이화원) 뒤뜰 들꽃 사이로 늘어선 항아리,

화분 가게 한편에 차곡차곡 쌓여 팔리기를 기다리는 항아리.

그곳에 눈길이 머무는 건 옹기빛을 품은 채 볼록하니 곡선을 타고 흐르는 형상이 온화해서다.


항아리가 물을 긷고, 김치와 장을 담아 저장하던 도구로 쓰일 때 태어나지 않은 것에 안도감이 드는 것처럼 <여인들과 항아리>에서도 노동을 밀어낸 항아리가 보였다. 파스텔톤의 화사한 배경과 꽃수레, 항아리와 동일한 색감의 새 한 마리가 힘든 노동을 걷어내고 휴식을 부추기는 갈래로 보였다. 섶을 여며 동여맨 저고리를 생략한 것도 '노동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는 것 같다.



거의 마지막에 전시되었던 천경자의 <노오란 산책길-1983>

천경자스러운, 꽃과 여인의 화가다운

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작품이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작가는 그림을 그리며 불거진 시간들은 치유하지 않았을까?


큰며느리를 모델로 그린 이 작품은 분채(조개가루, 생선뼈 등 생물 재료 물감 )와 석채(돌가루로 만든 물감)로 흡수력 좋은 전통 화선지 위에 색을 칠한 후 마르면 덫칠하는 과정을 반복해 밑에서부터 은은한 색이 우러나오게 표현한 꿈결같은 색채의 그림이다.


버드나무 아래 서서 먼 길목을 바라보는 여인은 누굴 기다리는 걸까? 노오란 꽃창포 몇 송이 꺾어 기다리는 이가 오면 전해볼까, 가슴에 안아 든 걸까? 머릿결이 단정해서 오히려 서글프다.

5월을 채운 노오란 꽃창포가 바람개비 되어 흘린 빛이 버드나무에도 연못에도 여인의 머리칼에도 드리웠다. 참나무에 걸린 백 개의 노오란 리본처럼.

여인을 바라보는 늙은 개는 귀한 소릴 먼저 들었나? 쫑긋 세운 귀에 반가운 소식이 건 아닐까? 기대하는 마음을 부르는 귀다.



네 작품이 유독 눈에 들었지만 외에도 마당놀이를 연상케 하는

김중현의 <농악-1941>

한 달 살이 하고 싶은

백남순의 <낙원-1936년경>

이제 막 봄이 오려는 듯한

변관식의 <산수춘경-1944>

손에 쥔 종이학이 궁금한

박래현의 <여인-1942>

투박한 작약이 흐드러지게 핀

나혜석의 <화녕전 작약-1934>

등이 발길을 잡고 눈길을 끌었다.


대다수가 처음 보는 작품들인데다 대작들이 많아 어떻게?왜?수집했을까 궁금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수집한 작품들이 오랜 기간 다양한 방법으로 전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던 봄날 미술관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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