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의 삶
열여섯 성격유형과 열여섯 개의 오기
방 책상 위에, 부엌 식탁 위에, 물이 남은 컵을 두는 걸 좋아한다. 사람에게는 언제나 흔적이 남기 마련이고 그 흔적이 가끔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아 마음이 단순히 그 자리에 머물러진다. 아스팔트 도로 위 긴 숲을 헤매지 않아도 되고 밭은 걸음으로 땅을 밀어내며 걷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남음'으로 '있음'이 증명되는 것이 좋을 뿐이다.
새로운 해를 7일쯤 남겨둔 연말의 밤에, 나는 그 해의 지난 358일을 순식간에 잊어버릴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카페 구석에 앉아 주문한 딸기 스무디가 맛있니 어쩌니 하는 소소한 대화를 하다가 mbti검사를 했는데, 지인 둘 다 ESFJ 사교적인 외교관 유형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다. 딱 여기서부터 나와 지인 둘은 다른 차선을 걷기 시작했다.
지인 둘은 한 번도 왜 사는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더불어 내가 생각에 잠겨있다 아침에서야 잠이 들곤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말도 안 돼. 보통 생각이라 함은 시작과 끝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아니, 그 존재도 자각하지 못한 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순환하는 것이 아니었나? 자신에게 의문을 가진 시간이 한 번도 없었다니. 차선은 하나에서 둘로, 열여섯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원래 둘로, 열여섯으로 갈라져 있었다.
열여섯 개의 mbti 성격유형, 나는 INTP가 나왔다내가 아주 번거롭게 살았던가, 구름을 뭉쳐 눈덩이를 만들려 했던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존재에 대한 물음들이 검열되기 시작했다. 흔적을 남기며 '나는 그래도 여기 있어요'라 증명받았던 순간들이 삶에 대한 집착과 오기가 되었다. 모두가 오기로 사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니 둥근 세상 속 모난돌이 된 듯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ESFJ 지인들을 바라봤다. 언제 어떻게 친해진 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한 건 그들 모두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는 사실이었다. 다가온 그들은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그날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도 그들은 내게 어떻게 지내는지, 뭘 하느라 또 연락도 없는지 먼저 묻는다.
사교적인 그들이 그런 질문을 하는 건 특별한 일은 아닐 거다. 그래도 내가, 그런 질문들도 결국 너희 자신을 염두에 두고 물었던 거냐고 물어보면 이상한 질문으로 맨날 대화가 샌다고 타박을 줄 것이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 혼자 골똘히 생각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는 다른 차선을 걷는 우리가 어쩌면 그 가벼운 안부 때문에 가까운 평행선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결론지었다.
나는 이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내가 푸르스름한 아침이 올 때까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듯 그들은 나에게 수년간 질문했다. 결국 같은 게 아닌가.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내가 '있음'을 확인하고 그들은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물으며 자신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처럼 그들도, 그리고 다른 열다섯 개의 차선들도 각자의 오기로 번거로울 테지. 사람과 삶을 너무 상동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든다. 그렇지만 모두 오기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둥근 모난돌이 된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오기롭게 살기로 나는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