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내 디폴트 값이라면
좋은 예술은 모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게 사람이라고.
동생의 말을 듣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종일 비가 내렸고 집 앞 병원에서 비염 약을 짓고 카페에 앉아 공모전에 제출할 대본을 쓰려고 했는데 친한 동생이 근처라며 잠깐 보러 온다고 했다. 동생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테이블까지 가져왔다.
동생 : 언니가 저번에 그랬잖아. 글쟁이들은 우울이 디폴트 값이라고?
나 : 응. 그랬었나.
동생 : 그래서인지 언니를 평소에 지켜보면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 같아. 언니 글 속 주인공들도 그래보여. 우울하고 예민한데 밝으려고 애쓰는 캐릭터 같아. 저번에 언니가 보여준 대본 주인공 순희도 파혼의 아픔에서 벗어난 척 엄청 노력하는 사람이잖아.
우산이 만들어낸 웅덩이가 깊어지고 있었다. 동생이 말하는 와중에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여지껏 나 정도의 우울은 양해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나 스스로에게는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이 우울을 피해가야 한다거나 애써 외면하자고 다짐한 적 없었다. 하지만 떠올려보니 나는 내가 스스로 우울한 것을 알고 더 밝으려 애썼던 적이 꽤 있었다.
예전부터 썩 잘 웃지 않는 내가 되레 밝게 웃는 때가 있다면 아주 우울할 때였다. 중학생 시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이 공교롭게도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만우절이라 거짓말 하는 거냐던 친구에게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만우절 장난 아니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할아버지와의 추억과 슬픔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4월 1일에 대해 생각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이후로도 나는 그랬다. 처음 애인과 헤어졌을 때도 나는 밝게 웃으며 그의 안녕을 빌어 주었고, 한 달째 글 쓰는 것을 놓고 겨우 숨만 낮게 쉬고 있었던 침잠의 시간에도 퇴사를 앞둔 친구의 행복한 앞날에 같이 미소지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우울은 언제나 그정도라고 생각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치부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우울을 내가 컨트롤하지 못하고 남에게 그 틈을 보이다니. 나는 갑자기 아주 우울한 사람이 되었다. 동생은 덧붙여 말했다.
동생 : 내가 어디선가 봤는데 사람들이 '살기 싫다'고 말하잖아, 그게 사실은 정말 살기 싫은 게 아니라 '이렇게 살기 싫은 거'래. 언니도 가끔 '기대하지 않는 삶'에 대해 얘기하잖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항상 언니로 인해 큰 용기를 얻는다고 생일편지에 적었던 동생은 내 우울이, 그로 인해 얼룩질 내 하루가 걱정됐던 것이었다. 글이란 걸 쓴다고 밤낮없이 방 안에서 골골대는 내 하루가 그리고 그런 하루 속에서 삶에 기대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내 우울이 신경쓰였던 거였다. 물이 진창 흘러내리는 우산 따위는 그녀에게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우울이 나에게 디폴트 값이라면, 그런데 내가 그 값을 인정하고 살기 싫어한다면, 그 설정값을 없애고 싶어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글이라는 예술로 승화하기엔 난 아직 너무 부족한데 그러면 아무도 그 우울을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나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