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폈는데 영수증이 나왔다. 잉크가 다 날아가서 구천 원이라는 시집의 가격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 영수증이었다.
다섯 달이 흘렀던가. 그동안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 시나리오는 네 개를 썼다. 그러니까 그중 하나만 영화가 된 것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약국 옆에 붙은 꽃집을 실제로 찾지 못해 제외됐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완전히 이해시키지 못할 거라는 고민으로 진행하지 못했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어느 감독님의 혹독한 비평을 견디지 못하고 단김에 접어버렸다.
그렇게 선택된 네 번째 시나리오는 지금은 때가 아니어서 절대 안 만들겠다고 말하던, 미루고 미루던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PD님: 자전적인 이야기는 힘이 있어. 그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생기는 거야.
나 : 아직은 제 이야기를 할 준비가 안된 것 같아요.
PD님: 지금 네 상황을 잘 풀어쓰면 돼. 열정과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 네 옆의 사람들을 눈여겨보면 어때?
가까운 지인에 따르면 10월의 나는 안색이 회색빛이었다고 한다. 네 번째 시나리오를 준비할 당시에 영화를 함께 준비하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당장에 영화 만들 돈은 주어졌는데 다들 각자의 사사로운 욕심만 채우려 하는 것처럼 '보였'고 게 중에 누군가는 아예 영화 만드는 일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보였'기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드는 데 열중하는 건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먹고 점점 무거워진 걱정은 스스로를 더욱 힘에 부치게 했다.
호박 속 벌레 같은 나날들이었다.
한껏 몸부림치며 굳어있기를 꽤 오래. 비가 오던 날 축축한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스텝들에게 시나리오를 공유한 후 회의를 위해 카페에서 모이기로 했다. 버스가 금방 온 덕에 5분 빨리 도착했는데 이미 모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나리오 얘기였다.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시나리오 뒤에 그들이 있었다. 대본 리딩과 촬영 스케줄은 어떻게 잡을 것인지, 미술은 어떤 레퍼런스를 참고할 것인지, 홍보 포스터에는 무슨 장면을 사용할 것인지, 각자의 할 일을 시작할 준비로 분주하게 있었다. 시나리오가 자꾸 바뀌면 재촉 한 번 할 법한데, 묵묵히 믿고 기다려줬다. 고마웠다. 고마워서 그들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때서야 굳어가는 호박 속에 외풍이 들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상자에 담아 시나리오의 결말에 넣었다.
촬영이 끝나고 가편집을 마무리한 지금도 몸과 마음이 아직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았다. 나와 그들, 우리에 대한 영화 안팎의 이야기는 꽤나 오래 나를 무겁게 하고 있다. 한동안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요즘 다시 노트북을 켠다. 결론을 내지 못한 일들을, 이제는 해결할 준비가 된 것 같다. 다섯 달 전 사놓은 시집을 거의 다 읽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