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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Jan 11. 2019

돌과 바람의 섬 크레타

그리스 크레타

나에게 크레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살던 섬이다.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중 크레타에 몇 년 살면서 겪은 일을 쓴 부분이 있는데, 그중에 생선요리를 먹으러 갈 때는 조그만 간장 통을 가져가서 몰래 생선에 뿌려먹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히다는 대목이 있었다. 하루키 씨가 종업원의 눈치를 보며 생선에 살금살금 간장을 뿌리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우습다. 그래서 나는 크레타를 만만하게 생각했었다. 생선 요리가 맛있는 평화로운 섬일 것이라고.


언제나 그랬듯 내 예상은 빗나갔고 12월의 크레타는 아주 지독했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것은 바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바람. 시내 한 복판에 돌풍이라도 부는 건지 사정없이 바람이 휘몰아쳤다. 크레타의 대표적 유적지는 크노소스 궁전이다. 동행은 유적에 아주 관심이 많은 지식인이라 크노소스 궁전에 꼭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늘 그렇듯 여행에서 특별한 목적지를 정하지 않는 나는 따라갈 수밖에.


크노소스 궁전 입구에 내리자마자 또 한 번 돌풍이 온몸을 가격했다. 캔자스의 외딴 시골집을 날려버릴 듯한 강한 바람이었다. 다행히 튼튼한 우리들은 날려가지 않았지만, 왠지 누군가에게 사정없이 뺨을 두드려 맞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바람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며 당도한 곳은 돌밭(!)이었다.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온통 돌무더기 밭. 크노소스 궁전이 웅장히 서 있는 게 아니라, 그 궁전의 터만 남은 유적이었던 것이다. 높은 건물이 없어서인지 바람은 한층 더 기세를 부렸고 눈물과 콧물이 줄줄 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 와중에 지식인 동행은 이 궁전이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에 지어졌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는 사람에겐 인류 문명의 귀중한 증거이지만 모르는 자에게는 그저 돌덩어리일 뿐이니, 나의 무식함을 탓할 수밖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 때 궁전이었던 돌무더기에 흥미를 잃고, 벤치에 앉아 주변의 나무를 관찰했다.

소나무로 추정되는 크고 억새 보이는 나무들은 바람을 얼마나 맞았는지 바람 부는 반대쪽으로 한결같이 허리가 꺾여 있었다. 아, 일찍이 김수영 시인이 일찍이 노래하지 않았나. 풀이 눕는다고. 풀은 눕는다. 그래, 풀은 눕는데 나무가 눕다니?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겠다는 대쪽 같은 소나무의 기개는 어디 가고 꺾일지언정 부러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살아남은 소나무라니. '크레타에서 소나무로 살아남는 법'이라는 책이 있다면 표본으로 실릴만한 자세다.  


 '살아남는다는 건 저런 것일 테지.'



그리고 나는 바람을 맞으며 그 자리에서 꺾어진 소나무들을 그렸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나와 시장에서 잊을 수 없는 맛의 수블라키를 맛보고 우리는 바닷가로 갔다. 바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고요하고 드넓은 아름 다운 에게해를 보고 있자니 바람에 따귀를 얻어맞으며 벌벌 떨었던 기억이 어느새 저편으로 잊히는 듯했다.






<크레타의 바다>

    

<컬러링 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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