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는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겨우 일어서자 바닥이 뱅글뱅글 돌았다.
"전 이제 가야겠어요. 갑자기 몸이 너무 안 좋아요."
"마침 잘 됐네요. 미인 기계에 들어가서 몇 시간 푹 주무세요.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겁니다. 여기 이 유리 양처럼 완벽한 미녀 가요.”
미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소파에 털썩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 저녁과 아침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떠올려보다 방금 마신 커피에 생각이 멈췄다. 커피에 뭘 탄 거지? 급기야 혀가 꼬이고 다리도 풀렸다. 다시 일어서려다 휘청대는 미라는 김이 부축해, 미라는 김의 팔에 어정쩡하게 매달린 자세가 되었다.
“네 명의 유리가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고 싶지 않으세요?”
“별로... 안... 궁금한데..."
어느새 네 명의 남자도 물 먹은 솜이불처럼 기운 없는 미라를 순식간에 둘러쌌다. 그 틈에 김이 재빠르게 미라의 두 손을 등 뒤로 결박했다. 미라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비명을 질렀다.
"살려줘...!"
"그, 그만 여자를 놔주지 그래. 저번 광고가 실수로 나가서 찾아온 여자야. 별로 원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그냥 보내주자고."
내내 조용하던 머리가 새까맣고 안색이 어두운 남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마르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도 거들었다.
"그래, 실험은 이제 중지하기로 하지 않았나?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된 이상 이대로 밀고 나가는 건 무리야. 이건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아."
“결함이라니, 무슨 결함 말입니까?" 김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미인 기계에 들어갔나 나온 여자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었지 않나. 다들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생태가 된 걸 똑똑히 봤잖아.”
“박사님, 그게 어떻게 결함입니까? 유리 1호를 보세요. 사고 능력은 없지만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그리고, 대체 누가 생각하는 미녀를 필요로 한답니까? 미녀는 그저 잘 웃고 순종하면 된다고요. 클라이언트들이 높이 사는 것도 바로 그 점이란 말입니다.”
미라는 김의 정강이를 차려고 힘껏 발을 올렸지만 헛 발길질만 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미라의 눈에 이제는 헛것까지 보였다. 눈앞에 영진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아, 오셨군요. 이 분이 저희의 다섯 번째 클라이언트이세요. 얼른 유리 5호를 만들 준비를 합시다. 이대로 뿔뿔이 흩어져서 집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싶지 않으면요!"
김이 남자들을 향해 소리치자 남자들은 우물쭈물하며 김을 도와 미라를 잡았다.
"영진아... 나 좀 살려줘...!" 미라가 마직막 힘을 쥐어짜 내 영진에게 소리쳤다.
영진은 전에 본 적 없는 고급 양복을 입고 입은 데다 늘 부스스하던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미라야,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니?"
영진은 미라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이 분들이 네 인생을 바꿔 주시겠다잖아. 넌 옛날부터 그렇게 팍팍하게 살았지. 뭐 하나라도 공짜로 주는 건 받지도 않고 도움을 청하면 될 일을 혼자서 끙끙대고. 쥐뿔도 없는 네가 혼자 힘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네 남자의 힘에 눌려 미라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영진을 미라의 턱을 오른손으로 꽉 쥐었다.
"그냥 싹 다 바꿔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지 그래? 별 볼일 없는 백수에게서조차 버림받은 너 자신이 넌 지겹지도 않니?"
"손님, 얼굴에 상처가 나면 불량품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이 아가씨를 여기 있는 유리와 틀림없이 똑같이 만들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이 영진의 손을 미라의 얼굴에서 억지로 떼어냈다. 그와 동시에 바람 빠진 풍선 인형처럼 미라가 픽 고꾸라졌다.
“어서 실험실로 데려 가!" 김이 소리쳤다.
축 늘어진 미라를 남자들이 가뿐히 들어 옆방으로 데려갔다.
미라는 사방에 스크린 화면이 비추는 방에서 눈을 떴다. 스크린은 네 개였고, 각 스크린마다 똑 같이 생긴 유리가 한 명씩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이국적인 리조트에서 수영을 즐기는 유리, 패션쇼장 맨 앞줄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고 앉아있는 유리, 리무진 안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유리,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여러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유리. 그들은 찍어낸 것 같이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미소를 짓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미라는 침대에 손목과 발목이 묶여 있어 일어날 수 없었다. 그 침대는 MRI 기계처럼 생긴 검정 기계에 연결돼 있었는데, 침대가 기계 안으로 쏙 들어갈 수 있을 크기였다. 미라는 고개를 돌리다 구석에 쓰러진 네 명의 박사를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마침 영진이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미라 곁으로 다가왔다.
“영진아...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가볍게 손 좀 봐줬어. 이 치들 밥 먹고 하는 일이 연구소에 앉아있는 거라 영 힘을 못 쓰더라. 저 뺀질뺀질한 놈도 입만 살았지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지던걸. 아깐 미안해, 그 놈들 안심시키느라 일부러 너한테 못된 소릴 했어.
영진은 미라 곁으로 다가와 손목과 발목의 스트랩을 풀기 시작했다. 그 따뜻한 손길에 미라는 마음이 놓여 눈물을 눈물이 찔끔 났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포항에 내려갔어야 했어. 너한테 연락할 경황도 없었어."
영진은 스트랩을 풀다 말고 스크린을 잠시 쳐다보더니 침대와 연결된 기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기계에는 ‘START' 라 쓰인 빨간 버튼이 혹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네 원망만 했어. 미안해...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이래 봬도 내가 기자 지망생이잖아. 증권가에서 돈만 내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녀를, 거기다 말 잘 듣는 미녀를 가질 수 있다는 루머가 돌길래 직접 조사해 보다가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내가 진짜 특종을 따내면 언론사 취직에 유리하겠단 계산도 있었고."
"네가 안 왔다면 나는 지금쯤 이 기계에 들어갔겠지?”
“넌 뭘 믿고 여자애가 겁도 없이 혼자 이런 델 왔어? 하여간 사람 잘 믿는 것도 병이라니까.”
아까부터 영진의 눈은 미라가 아니라 스크린 속의 유리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영진은 스크린을 주시하며 괜히 기계를 손바닥으로 쓸어보기도 하고, 내부를 살피는 척 딴청을 피웠다.
“이걸 누르면 작동하는 건가... 보기보다 기계도 허술한 거 같은데. 미라야, 만일 이 기계가 정말로 작동하는 거라면 말이야.”
“응?”
“정말로 유리 4호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변신이 가능했다면 이건 손해 볼 게 없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눈 한번 딱 감고 저 기계에 들어갔다 나오면, 너도 좋고 나도 좋잖아."
영진은 이제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스크린만 바라봤다. 동공은 확장됐고 입은 점점 벌어졌으며, 혀로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다. 미라는 영진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스스로 결박에서 벗어나려고 힘껏 몸부림쳤다.
"정신 차려! 사람이 기계에 들어갔다가 얼굴이 바뀌어서 나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때 흥분한 영진이 미라의 몸 위에 올라타 미라를 짓눌렀다.
“씨발, 가만히 좀 있어! 나도 유리 같은 여자랑 한 번만 해보자!”
영진의 억센 손이 미라의 얼굴을 내려치려는 순간 미라는 눈을 감았다. 눈 앞에서 불이 번쩍임과 동시에 미라는 자신이 끝없는 검은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느꼈다.
스크린 속의 유리들은 여전히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명의 유리는 어느 순간 하나로 합체됐다.
"나는 행복해요." 네 명의 유리가 한 목소리를 냈다.
미라는 파도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앞에 생전 처음 보는 투명한 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자신은 바다 한가운데에 세워진 해먹에 누워 있었다. 언젠가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쓰려고 저장해 둔 사진과 비슷했다. 미라는 평생 입어본 적 없는 비키니를 입은 데다, 팔다리는 누군가 늘여놓은 것처럼 더 길고 늘씬했다. 미라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봤다. 예전과 다르게 코에 우뚝 솟아있었고 턱이 뾰족했다.
멀리서 울긋불긋한 알로하셔츠를 입은 뚱뚱한 사내가 칵테일을 들고 왔다.
“이제 일어났어? 자, 당신 몰디브에 오면 꼭 모히토 마실 거라고 했잖아.”
미라는 칵테일 잔을 받아 들고 잔에 맺힌 물방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방금 전 무슨 꿈을 꾼 것 같았는데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뭐해, 어서 마셔. 쭉 들이키라고.”
“네.”
미라는 말 잘 듣는 초등학생처럼 모히토를 꿀꺽꿀꺽 마셨다.
"그렇지, 우리 사랑스러운 유리. 몰디브 바다에 사는 인어공주가 따로 없다니까.”
미라는 유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무언가가 머리를 한 대 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내 이름이 유리예요?”
"미안 미안! 우리 프린세스라고 부르는 걸 깜빡했네. 나의 하나뿐인 프린세스! 어서 옷 갈아입고 파티장으로 가자고."
"네.”
미라는 워터 빌라 객실에 준비된 하얀 미니 드레스로 갈아입고 거울을 봤다. 검고 풍성한 생머리에 투명한 하얀 피부, 그린 것 같은 눈썹과 까맣고 초롱초롱한 눈과 오뚝한 콧날, 도톰한 입술, 군살이 없는 매끈한 팔다리. 자신이 봐도 반할 만큼 아름다운 자태였다.
거울을 본 미라는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다음 순간 머리에 구름이 낀 것처럼 몽롱해졌다. 미라는 그 순간 무얼 해야 할지 몰라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살찐 사내가 들어왔다.
“오, 나의 프린세스, 에인절 베이비! 당신은 정말 완벽해! 어서 나가자고, 나의 유리가 가장 완벽하단 걸 세상에 자랑해야겠어.”
“네.”
야자수로 둘러싸인 야외 파티장에는 수십 명의 커플이 참여했다. 남자들은 생김새가 제각각인 데 비해 여자 들은 쌍둥이라도 된 듯 비슷비슷했다. 머리 길이나 색깔, 화장법만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미라는 방금 전 거울에서 봤던 자신과 빼다 박은 여자들을 보곤 겁이 났다. 왜 겁이 나는 거지? 미라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리가 아파서 그만두었다. 하지만 어쩐지 한기가 들어 살찐 사내의 팔짱을 꼭 끼고 걸었다.
그 때 살찐 사내가 미라를 돌아봤고 미라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머리 속 안개가 걷히며 드디어 할 말이 생각났다.
“유리는 행복해요. 아주... 행복하답니다.”
살찐 사내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
illust by M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