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그림 소설
"너도 소울 트리를 한 번 찾아가 봐."
동석은 진호에게 소울 트리를 알려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삼 년 만에 만난 대학 동기 동석의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일단 얼굴색이 밝아졌고 입가에는 미소가 걸린 데다 미간 사이에 세로로 패인 주름도 사라졌다.
"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가는데 하소연을 실컷 하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 우리가 하는 고민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거라잖아. 아무튼 소울 트리에게 털어놓고 나면 잡생각이 싹 사라지고 마음은 구름에 둥실 뜬 것처럼 가벼워져진다니까”
구름에 둥실. 예전의 동석이라면 입에도 담지 못할 낯간지러운 표현을 잘도 썼다.
"소울인지 뭔지가 무슨 고민 상담소라도 되냐?"
"말하자면 그런 거지. 무슨 문제든 해결해 주니까 말이야. 떼인 돈 받는 것만 빼고 말이야, 하하."
동석은 삼 년 만에 몰라보게 피폐해진 진호의 외모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더니 자기 명함에 ‘소울 트리’의 주소를 써서 내밀었다.
“인마, 한 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살아야 할 것 아니야. 매사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게 행복의 비결이야.”
동석은 진호의 어깨를 두드리고 밤거리의 휘청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진호는 일 년 넘게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살이 빠졌고 다크서클은 진해지고 볼살이 홀쭉해졌다. 우울과 불안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다 보니 어딜 가나 '우환이 있어 보인다'며 도인들이 접근해 왔다.
'소울 트리라는 것도 그런 부류일까?'
오랜만에 연락해오는 친구들 중 몇몇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신흥 종교에 빠졌다거나 보험 판매원이 되었거나 다단계에 빠졌다거나... 그들은 하나 같이 무한 긍정주의자로 변해있었고 진호를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했다. 동석이 말한 ‘소울 트리’는 교주나 무속인일 것이다. 어쩌면 말발 좋은 소위 ‘힐링 전도사’ 거나 철학가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열두 시경 집에 도착해 보니 래미가 현관 앞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래미를 흔들어 깨우자 술 냄새가 훅 끼쳐왔다.
“비밀 번호는 왜 바꿨어요?"
"자꾸 맘대로 들락날락 거리는 고양이가 있어서."
"이거요, 선배 생각나서 싸 왔어요. 히히."
래미는 언제나처럼 거실 소파에 쓰러져서 바로 잠들어 버렸다. 래미가 가져온 까만 비닐봉지 안에는 먹다 남은 떡볶이가 두세 점 있었다. 래미는 술에 취하면 늘 무언가를 집어오곤 했는데 그 종류는 술집 메뉴판에서부터 노래방 마이크, 양주, 소주, 휴지에 싼 닭발, 오징어, 땅콩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래미는 진호의 회사에서 일하는 열 살 아래 직속 후배였다. 한 번은 래미가 회식 자리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해 길바닥에 앉아 엉엉 울었다. 사수라는 이유로 진호는 래미의 뒤처리를 맡게 됐고, 진호는 래미를 등에 업고 자기 집에 데려갔다.
그 날 진호는 화장실이며 거실에다 먹은 걸 다 토해내는 래미를 따라다니며 밤새 닦고 치웠다. 새벽 두 시경 래미가 소파에 쓰러져 잠든 걸 보고 진호도 침대에 누웠다.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아침 여덟 시였고, 래미는 새끼 고양이처럼 진호의 품 안에 잠들어 있었다. 진호는 래미와 나란히 누워있다는 사실보다 여섯 시간을 깨지도 않고 내리 잤다는 데 더 놀랐다.
그 날 이후, 래미는 술에 취하는 날이면 회귀본능 있는 연어처럼 진호의 집에 찾아왔다. 진호는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는 척했지만 은근히 래미가 오는 날을 기다렸다. 길어야 하루 세 시간밖에 못 자는 진호는 래미가 있으면 대여섯 시간은 잘 수 있었다. 언젠가 진호가 아침에 눈을 뜨니 래미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검고 커다란 눈이 꼭 고양이 같았다.
"나는 선배의 수면 젠가 봐. 불면증 있다는 거 거짓말 아니에요?"
두 사람은 회사에서는 데면데면하게 굴었고 평소 문자나 전화 통화를 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진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다 갈 곳을 잃은 두 마리 짐승이 체온을 나누는 것뿐이라고. 시베리안 허스키가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자는 것과 다름없다고. 래미는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가는 암고양이일 뿐이라서 언젠가 정말로 멋진 수고양이를 만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래미가 발길을 끊은 건 소울 트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부터였다. 래미가 멀쩡한 정신으로 초저녁에 찾아온 날이었다. 래미는 잔뜩 들떠 있었고 오자마자 소울 트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그래서 소울 트리한테 고민을 모두 말했어요. 이래서 저래서 힘들고, 그만둘 수도 없고 계속할 수도 없고 어쩌고... 한 삼십 분 동안 내 얘기만 했어요. 그런데 그 소울 트리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내 모든 고민거리를 자기한테 놓고 가래요. 귓속말로 속삭이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돌아오는 데 고민이 해결된 것처럼 진짜 후련하지 뭐예요."
그 날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인 래미는 분주히 집안을 오가며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청소기를 돌리며 진호의 청소 습관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래미의 낯선 모습을 빤히 보고만 있던 진호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래미가 진호의 여자 친구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 이제 나가!"
래미가 그 소리에 청소기를 껐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나가라고! 내가 언제 청소해 달래? 남의 집에서 이러지 말고 빨리 나가줘."
래미는 청소기를 소리 나게 바닥에 내려쳤다.
"선밴 왜 그렇게 자기밖에 몰라? 사람이 이기적이고 냉정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진짜 소울 트리를 찾아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선배야!"
래미는 현관문을 부서져라 닫고 나갔다. 그 날 이후 래미는 다시는 진호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진호가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다. 꿈에서 진호는 낯선 골목을 헤매다 검정 대문이 있는 집 앞에 멈춰 섰다. 대문 바깥으로 뻗어 나온 장미 넝쿨에서 떨어진빨간 꽃잎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대문이 문이 열리고 열 살가량의 소녀가 꽃잎을 밟으며 나왔다. 소녀가 걸을 때마다 무릎에서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바닥은 피와 소녀의 밟에 짓이겨진 붉은 꽃잎으로 금세 붉게 물들었다.
소녀의 종아리에는 파랗고 빨간 멍과 상처가 가득했다. 선명한 학대의 흔적에 진호는 누굴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소녀의 얼굴을 확인하려 할 때쯤 진호는 늘 잠에서 깨었다. 불면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해졌다.
나날이 시들어가는 진호와 달리 래미는 나날이 화사한 꽃처럼 피어났다. 어디선가 래미의 목소리가 들려서 보면 래미가 남자 직원들에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진호와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낸 적 없는 높은 비음을 섞어가며 이야기하는 래미는 다른 여자가 된 것 같았다.
어느 일요일 새벽, 겨우 잠든 진호는 다리가 이상하게 꼬이는 느낌에 눈을 떴다. 두 다리가 나무뿌리로 변한 채 서로 꼬여 있었다. 꼬인 다리는 더욱 꼬이기 시작했고 피부 아래에 수십 마리 거머리 떼가 기어 다니며 피를 빨아먹는듯한 기분 나쁜 통증이 일었다. 진호는 다시 눈을 감고 어서 꿈에서 깨길 기다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무뿌리로 변한 다리는 그대로였다. 진호는 엄청난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잠이 들었다.
진짜로 잠에서 깨었을 때는 겨우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두 다리는 평범하게 놓여있었고 나무로 변하지도 않았다. 진호는 자신이 미쳐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진호에게 친구는 드물었고 더구나 일요일 아침에 할 사람은 없었다.
진호는 참지 못 하고 래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자고 있었니?
"왜 전화했어요?"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선배 이렇게 질척거리는 사람이었어요?"
"미안해."
"뭐가요?"
"......."
"할 말 없으면 끊어요."
래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진호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진호는 책상 서랍에 던져 넣은 동석의 명함을 찾았다. 뭐든지 해결해준다는 소울 트리를 찾아가 동석과 래미처럼 마음이 가벼워지고 싶었다.
소울 트리가 있다는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진호는 기시감을 느꼈다. 좁은 골목 끝에 있는 검정 대문 집, 담장 너머 뻗어 나온 장미 넝쿨에서 떨어진 붉은 꽃잎. 그 꿈과 똑같았다. 대문이 열리면 피 흘리는 소녀가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진호는 대문을 살며시 열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도 붉은 장미꽃잎 천지였다.
"들어와요."
현관문 안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슨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거대한 나무에 기대앉아 있었다. 얽히고설킨 나무뿌리는 방바닥을 가득 메웠고, 굵은 뿌리 몇 개는 시멘트 바닥을 뚫고 땅 속까지 파고들어가 있었다.
나무뿌리를 밟지 않으려 조심하며 진호는 한발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가 나무에 기댄 게 아니라 나무에서 자라나기라도 한 듯 보였다. 여자의 어깨부터 등까지는 나무에 단단히 들러붙었고, 드레스 아래로는 다리 대신 굵은 나무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는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였는데, 정작 여자는 평온해 보였다.
나무에 붙어버린 여자라니... 진호는 내내 소파에 앉아 살던 뚱뚱한 여자의 몸이 소파와 붙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떠 올렸다.
illust by M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