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작업'과 '싫어하는 작업'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업은 '디자인'이다.
그리고 싫어하는 작업은 '디자인'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업은 '그림'이다.
그리고 싫어하는 작업은 '그림'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업은 '개발'이다.
그리고 싫어하는 작업은 '개발'이다.
???
'좋아하는 작업'과 '싫어하는 작업'이 같은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디자인', '그림', '개발' 모두 내가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작업이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들어보시라.
나는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4년 내내 전공과목에서 A를 놓친 적이 없다. 학과 전시까지 포함하면 전시도 5번 이상 참여했다. 자랑하려고 말하는 건 아니고 그만큼 디자인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다.
과제를 받으면 동기들은 하기가 싫은지 언제나 제출일 전날 과제를 시작했다. 나는 보통 과제를 받으면 당일날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교수님께 중간 컨펌을 요청하고 제출일 전날에는 밤을 새우며 한 번 더 디벨롭했다. 남들보다 먼저 시작한 데다 중간 컨펌까지 받으니 교수님 눈에 더 띄고 결과도 좋을 수밖에! 디자인은 내가 공부라는 것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고마운 친구다.
하지만 나는 디자인을 싫어한다. 디자인을 '배우는 것'과 디자인으로 '일하는 것'이 크게 다르다는 걸 알게 되고부터였다. 당시 내가 디자인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실제 디자인 실무와 별개이고 내가 듣고 경험하고 느낀 것에 대한 이야기다.
디자인 연구센터에서 교수님과 함께 일하며 실무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시안 작업이 나에게 주어졌고 몇 차례 디벨롭 끝에 클라이언트가 내 시안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최종 선택을 받는 날, 웬걸 내 시안이 떨어지고 교수님의 시안이 선정되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교수님이 자신의 시안을 적극적으로 어필해 클라이언트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사실 크게 억울하지는 않았다. 학생이기도 했고 내 시안이 선정이 된다고 해서 돈을 더 받는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근데 앞날이 걱정되더라. 당시 디자이너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래서일까 매일 밤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월급 150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 또한 내 디자인과 함께 언제든지 후려쳐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좋은 디자인이 아니라 클라이언트 취향의 디자인, 설령 클라이언트의 취향에 맞추었어도 상사에게 공을 뺏길 수 있었다. 디자인은 객관적 평가를 받기가 어렵기에 더더욱 평가절하 되기 쉬웠다. 그럼에도 경쟁은 치열한... 보상은 너무나 적은...
디자인으로 밥 먹고 살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가장 좋아하던 디자인이 싫어지고 말았다.
디자인을 포기하고 내가 선택한 길은 그림 그리는 일이었다. 정확히는 애니메이션 배경 작화. 당시 친구가 다니던 스튜디오에 지원을 하고 함께 다니게 되었다. 애니메이션은 분업화되어 있는 산업이다. 기획, 콘티, 동화, 배경, 녹음, 촬영, 등등 각기 다른 스튜디오들이 협업하며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중에 나는 배경을 맡았고 첫 2년 동안 정말 재밌게 그렸다.
원래 그림을 좋아해서 미대를 지원했었기에 실제 그림 그리는 일로 돈을 번다는 것이 좋았다. 애니메이션만의 문법이 따로 있었고 그런 지식을 습득하고 전문성을 가지는 내 모습이 좋았다. 내가 하는 만큼 번다는 점도 좋았다. 보통 그림을 그린 장수로 계산을 하기 때문에 많이 그리면 그릴수록 일반 직장인보다 더 많이 벌 수 있었다.
내가 그린 그림이 전 세계에 방영된다는 점도 좋았다. 한국, 일본, 미국 등 다양한 국가의 애니메이션에 참여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한국에서 흥행한 신비아파트가 있겠다. 신비아파트 이무기 편의 야외 배경을 내가 거의 다 맡았는데,, 당시 이틀 동안 집에 안 들어간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그림도 3년이 지나자 점차 슬럼프가 오기 시작했다. 어려운 그림이 오면 그리기 싫어졌고, 실력은 계속 제자리였다.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야 다음 레벨로 넘어갈 수 있을 텐데...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는 만큼 버는 것이 장점이라 생각했는데, 내 노동과 시간으로 돈을 버는 것에 한계가 느껴졌고 점차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림이 질리기 시작했다. 특히, 감독님과의 소통이 가장 답답했다. 감독님은 주로 그림을 컨펌하고 피드백을 주고 필요하면 알려주는 역할을 하셨는데, 종종 피드백이 선을 넘을 때가 많았다. 넘겨짚기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거나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다. 평소에는 좋은 사람인데 예민해지면 스튜디오 분위기가 오싹해졌다. 이런 경우가 날이 갈수록 많아지다 보니 어느 순간 스튜디오에 있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
이때, 틈만 나면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봤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결국 터지기 직전.. 밤 10시쯤이었던가, 감독님께 그만둔다고 말하고 짐을 쌌다.
개발은 그림을 포기하고 한 참 후의 이야기이다. 개발은 오히려 겁이 났다. 내가 수학을 정말 못했기에(개발을 하려면 수학을 잘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나는 개발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뉴스에서 개발자가 뜨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왔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당시 혼자 어떻게 개발을 배우지 하다가 생활 코딩과 노마드 코더의 강의를 보면서 독학을 시작했다. 결과는? 개발이 정말 재미없다고 느꼈다.. 일단 생활 코딩은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5분만 지나면 눈이 감겼다. 노마드 코더는 나름 카카오톡 클론코딩도 하며 맛을 봤지만 재미까지는.. 애매했다... '이걸로 개발자 할 수 있어?'라는 의문만 점차 커졌다.
그러던 중, 유튜브 [코딩 알려주는 누나]의 첫 영상 독학과 부트캠프를 비교하는 영상을 보고 부트캠프를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도 나는 내가 어떤 환경에서 몰입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고, 코로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비지원이 되지 않음에도, 오프라인 부트캠프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지금도 너무너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글에도 언급했듯이 부트캠프는 정말 너무너무 재밌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개발이 이렇게 재밌구나, 배울 게 많다는 것이 좋았고, 동기들과 함께 배운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매주 주말마다 세션을 기획해서 열었는데, 덕분에 평일 주말 할거 없이 정말 재밌는 하루하루가 되었다.
부트캠프 과정 중에는 기업협업이 있었다. 동기들과 헤어져 각자 지정된 회사로 한 달 동안 출근했다. 나름 기대를 잔뜩 하고 회사로 향했는데 이때 알게 되었다. 개발이 정말 재미없다는 것을... 내게 주어진 일은 주식 시장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받아서 데이터베이스에 적재하는 일이었다. 개발을 시작한 지 몇 개월 안된 주니어에게는 난이도가 있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나를 담당한 사수는 다른 언어로 된 레퍼런스 코드 하나만 주고 사라졌다. 사수와의 미팅 시간은 1주일에 한 번, 약 30분 정도였고... 나는 미팅 시간을 제외하곤 아무런 피드백 없이 사무실 한 구석에서 혼자 씨름하며 버텨야 했다. 당시 1주일에 한 번 동기들과 만나는 시간이 있었는데, 동기들이 내 얼굴을 보더니 잿빛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언제나 열정이 넘치던 나였는데 매일 눈물이 고이는 한 달이었다.
뭐 어쩌면 이게 당연한 현실이랴.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피드백을 받을 수 없다면 내가 스스로 준다는 마음으로 매일 일지와 배운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후 블로그를 1년 이상 매일 썼는데 이때의 경험이 없었으면.. 그렇게 했을까 싶다) 다행히 한 달 동안 요구한 사항에 대해서는 구현을 했다. 물론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덕분에 내 멘탈은 더욱 강해져 있었다.
이후 취업 준비를 통해 들어간 회사는 마찬가지로 주식 도메인의 핀테크 회사였다. 이곳에서는 전담 사수와 온보딩 기간이 있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밀하고 자세한 피드백과, 동료들이 함께 책임지는 문화가 있었다. (온보딩 기간에 받은 PR 코멘트를 합치면 아마 200개는 넘을 거다) 매일 글 쓰는 습관이 있었기에 업무 과정에서 배운 것들은 매일 글로 정리했다. 정리한 글은 블로그에 올리고 사내에도 공유했다. 이것이 나중에는 조직 문화가 되어 서로가 배운 것을 기록하고 한 곳에 모으는 저장소까지 만들기에 이르렀다.
한 달에 한 번 커피미팅을 가지며 개발팀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술을 논하는 게 재밌었고 함께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게 좋았다. 디렉터님은 각 개발 팀원들에게 맞는 적절한 일감을 분배할 줄 아시는 분이었고 윗단의 무리한 개발 요청은 쳐내실 수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일까 개발이 정말 재밌었다!
이후, 슬랙 봇을 개발하고 사이드 프로젝트나 해커톤에 참여하며 지금은 1인 개발을 하기에 이르렀다. 개발은 지금도 재밌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이런 말을 커뮤니티에 올리기도 했다ㅎㅎ
서두에 내가 말한 "디자인, 그림, 개발 모두 내가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작업이다."라는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되는가?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얻은 깨달음은 내가 '좋아하는 작업', '싫어하는 작업'은 사실 특정 '직무'나 '작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맥락'에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디자인이든, 그림이든, 개발이든 그 작업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다. 빠른 피드백, 효능감, 공정함, 좋은 동료들, 적절한 보상 등. 내가 선호하는 맥락들이 갖춰진다면 나는 그 일이 어떤 일이든 좋아할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이 글이 그 증거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