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영원성 혹은 덧없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프랑수아즈 사강
저자 소개
본명 프랑수아즈 쿠아레((Francoise Quoirez).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인 사강을 필명으로 삼았다. 1935년 프랑스 카자르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했다.
1954년 19세의 나이로 첫 소설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해 프랑스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 해 비평상을 받았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알코올과 마약, 도박 중독 등 굴곡 많은 생애를 보낸 그녀는 50대에 두번씩이나 마약복용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당당한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2004년 심장병과 폐 질환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1959년에 발표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저자가 스물네 살의 나이에 쓴 작품임에도 서른아홉 살의 여주인공 심리 뿐만 아니라 주인공과 연결된 두 남자의 심리 또한 굉장히 현실감있게 묘사된다.
연인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사이사이 적당한 위트와 함께 결코 가볍지 않은 진중함으로 보여주기에 구절구절마다 깊숙이 와닿는다.
아울러 내 사랑의 기억 또한 떠올려 본다.
이것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문학의 보편성이리라.
소설의 시작
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좌절로 얼룩진 거울 속의 얼굴을 서른아홉 해로 나누어 보았다.
자신이 손가락 두 개로 잡아당기는 그 탄력 없는 살갗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 아가씨의 대열에서 아줌마의 대열로 마지못해 넘어가고 있는, 외모에 몹시 신경을 쓰는 또 다른 폴의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소설 속 폴과 같은 나이인데서 오는 동질감일까.
그녀의 이런 모습과 상념이 낯설지 않다.
실내장식가인 서른아홉 살의 폴. 그녀가 한 번의 이혼을 겪고 자신을 사랑한 남자와의 연애 후 만난 남자 로제는 육 년 동안 함께 지낸 연인이다. 폴은 그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누군가와 사귀는 일 같은 것은 결코 없으리라 생각한다.
아파트에 혼자 사는 그녀. 오늘밤도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 역시 무기력한 평온 속에서 보내야 하는 외로운 밤들의 긴 연속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가만히, 가슴 아프게 고독을 되씹었다.
머리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생기를 주고 표정을 바뀌게 하는 유일한 얼굴이었던 로제.
그는 폴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나 마음 내킬 때만 그녀를 찾고 다른 여자들과 하룻밤의 즐거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여자를 책임지는 일에서 자유롭고 싶어하는 남자.
로제가 그녀의 집을 나서는 순간, 보도 위에서 그 자신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존재라는 강한 자유의 냄새를 맡는 순간, 그녀는 또다시 그를 잃고 말리라.
그가 확신하는 유일한 것은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폴의 사랑이었고 몇 년 전부터 그녀에게 집착해 온 자기 자신의 마음뿐이었다.
시몽과의 만남
그러던 어느 날, 폴은 일을 의뢰한 미국 여자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스물다섯의 잘생긴 젊은 변호사 청년 시몽을 만난다.
폴에게 첫눈에 반한 시몽.
불안해하면서도 끌리는 폴.
자신의 마음을 애써 외면하려는 폴에게 시몽은 가장 지독한 형벌을 선고한다.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시몽은 그녀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간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자, 나가서 좀 걸을까요. 지금 날씨가 무척 좋네요."
폴은 자기 팔을 잡고 있는 그에게 애정을 느낀다. 이 낯선 청년이, 일시적이지만 그녀의 동반자가 되어, 한 해의 마지막에 황량한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산책의 동반자든 인생의 동반자든,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언제나 애정을 느꼈다. 그들, 무척 다른 동시에 아주 가까운 그들이 그녀 자신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에 대한 감사 같은 것이었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모차르트를 좋아하세요' 라는 뻔한 질문이었다면 별 감흥을 주지 못했을 시몽의 편지 속 구절.
열네 살 연상이었던 클라라 슈만을 평생 마음에 품었다는 브람스의 일화는 시몽이 폴을 연모하는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일까.
또한 대개의 프랑스인들은 브람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그의 물음은 폴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고 되내일 수 있는 생각의 여지를 준다.
(저자는 책 제목이 물음표가 아닌 말줄임표로 끝나야 한다고 강조한 적이 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경험이란 좋은 것이다. 좋은 지표가 되어준다.
열정적인 연인 역할을 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처럼
시몽은 그녀에게 헌신적이다.
"사실 저는 연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저는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이자 사랑에 빠진 연인이자 버릇 나쁜 아이 역할을 연기했지요. 하지만 당신을 안 이후 제가 연기한 그 모든 역할은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하지만 폴은 로제와의 관계를 생각한다.
'이 혈기 왕성한 청년이 자신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기쁨과 회의와 온정과 고통으로 뒤범벅된 그 오년을. 그 누구도 자신을 로제에게서 떼어낼 수는 없으리라.'
그럼에도 시몽의 열정과 애정은 물러설 줄 모른다.
당신이 다시는 저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제겐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제겐 당신을 사랑할 권리가 있고,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서 당신을 빼앗아 올 권리가 있습니다. "
'내겐 저 여자가 필요해.
그녀가 필요하다고...그녀를 갖지 못하면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될 거야.'
'그녀를 제대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폴의 갈등
나는 불장난 같은 것은 결코,
결단코 할 수 없단 말인가?
폴은 그녀에게 고독만을 안겨주는 연인 로제에 대한 잔인한 복수, 불합리한 욕구를 시몽에게 밀어붙여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내 뉘우친다. 그런 잔인성, 곧 복수에 대한 불합리한 욕구는 자신의 슬픔의 이면이었을 뿐, 시몽은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기에.
그의 손가락에서 맥박이 파닥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눈물이 고였는데, 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행복을, 자신이 그에게 준 행복을 공유하고 싶다.
하지만 세상의 시선은 어떠한가.
그녀 자신은 스스로가 늙고 지쳤다고 생각되어 약간의 위안을 얻으려는 것뿐인데, 그들은 그녀가 젊은 남자나 좋아한다며 요란스럽게 입방아를 찧어 대리라.
그녀에게 시몽은 스쳐가는 위안일지 몰라도
시몽에게 그녀라는 존재는 삶 전체인 것을.
혈기왕성한 시몽의 주된 관심사는 오로지 지금 현재 폴과의 사랑이다.
시몽은 행복했다. 그는 자신보다 열다섯 살 연상인 폴에게 열여섯 살짜리 여자 아이에게보다 더 큰 책임감을 느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그 자신도 행복해지리라.
어째서 당신은 내가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를 망치기를 바라는 거지?
내가 관심있는 건 오직 내 현재뿐인데 말이야.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해.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날아오르는 듯한 행복한 순간을 담은 책 표지의 그림은
시몽의 폴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일까.
폴이 갈망하는 로제와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일까.
로제로 인해 눈물을 보이는 그녀를 향한 시몽의 외침은 절절하다.
"난 누구든 당신을 울리는 걸 참을 수가 없어.
당신을 울리기보다는 차라리 나 자신이 고통받는 편이 나을 텐데"
맹목적인 숭배에 가까운, 폴에게 바치는 시몽의 열렬한 사랑.
무모한 사랑.
"당신은 내 인생의 연인이고 , 무엇보다도 내게 필요한 사람이야. 나는 알아. 당신이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신과 결혼하겠어."
그래, 나에게도 시몽처럼 쉽게 다짐하던 누군가가 있었지..
"당신은 나보다 열네 해를 더 살았지만, 나는 현재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할 거야. 그뿐이야."
가슴 뛰던 그 말.
다시 익숙함 속으로
하지만 그녀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누군가가 있고 그것이 곧 로제라는 생각에 저항했다.
십년 뒤에 그녀는 혼자가 되거나 로제와 함께 지내게 되리라. 그녀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집요하게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거듭 속삭이고 있었다.
나의 희생양. 나의 사랑스러운 희생양.
나의 귀여운 시몽.
시몽의 폴에 대한 사랑이 폴과 로제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해 준 매개체가 되고 만 것인가.
스스로도 속수무책인 이중성.
그녀로서는 로제와 자신, 그들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난 너무 불행했어."
"나도 그랬어."
로제는 결국 폴에게 용서를 구한다.
폴은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에 무너져버리고..
여기서 끝이났다면 그들 사이는 해피엔딩이었을까?
자신의 집에서 시몽과 마지막 시간을 가지는 폴.
시몽의 짐을 싸고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서 몸을 빼더니 짐을 놓아둔 채 나가 버렸다. 그녀는 그를 따라 난간 너머로 몸을 굽히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결국 또 반복되는 고독감과 권태로움은 어찌할 것인가.
사랑은 영원한 것인가. 덧없는 것인가.
사강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1961년 프랑스와 미국이 합작해서 만든 흑백 영화로
프랑스에서는 소설의 원제목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미국에서는 <굿바이 어게인(Goodbye Again]>, 우리나라에서는 <이수(離愁)>라는 제목으로 각각 상영되었다고 한다.
영화의 주제음악 '브람스 교향곡 제3번 3악장'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며 책을 다시 펼쳐본다.
그들의 사랑 속으로
내 사랑의 기억 속으로
구절구절 천천히 다시 음미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