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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이 Feb 23. 2017

괜찮아, 꿈꾸던 모습이 아니어도..<태풍이 지나가고>

ㅡ "이 모든 걸 뭉뚱그린 게 내 인생이니까"


제목에 무려 '태풍'이 들어가도(영화의 시작도 태풍 23호 소식이건만) 놀라우리만치 잔잔하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비롯하여 <바닷마을 다이어리>,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 명성이 자자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들을 하나씩 보려고 찜은 해두었으나 못 보고 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그의 영화를 만났다.

어떤 작품으로 시작할까 고민하다 제목에 끌려 <태풍이 지나가고>(2016)를 골랐다.


첫장면에 등장하는 두 여자 배우의 얼굴이 낯익다.

<카모메 식당>의 고바야시 사토미,

<앙 : 단팥 인생 이야기>의 키키 키린.

각각 딸과 엄마의 역할을 맡은 그녀들의 대화와 은근 위트있는 표정에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특히 키키 키린 할머니는 여전히 귀여우시다 ;)


<태풍이 지나가고>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메시지가 인물들의 대사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런 점에서 우회적으로 깨달음을 주는 전작들이 더 낫다고.


그래도 괜찮다.

돌려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나누는 얘기들에 팍팍 공감가는 때도 있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키키 키린) 혼자 사는 집에 아들 '료타'(아베 히로시) 찾아오고,

베란다에 있는 귤나무에 물을 주며 대화를 나눈다.


"이 귤나무 기억하니?" (엄마)


"고등학교 때 내가 귤씨 심은 거잖아. 엄청 자랐네."

(아들)


"너라고 생각하고 날마다 물을 주고 있어.

애벌레가 이 잎을 먹고 파란 문양을 지닌 나비가 됐단다.

꽃도 열매도 안 피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고 있어." (엄마)


아들은 엄마더러 "말씀 참 얄밉게 하시네" 라며


"나도 세상에 도움 따위는 되고 있어"


또는,


"난 말야, '대기만'형이야"


라고 큰소리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다.


"뭐 그리 오래 걸리냐"


는 엄마(키키 키린)의 대답이 꼭 나를 향한 것만 같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걸까.


"내 인생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건지.."


15년 전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명색이 소설가지만, 현실은 소설 취재 차원을 핑계로 흥신소 일을 하며 돈에 쪼들리는 이혼남 '료타'(아베 히로시)가 메모해두는 구절을 나 역시 끄적거리고 있다.

그래도 엄마한테는 끌어안고픈, 자랑스러운 아들이리라.


살다보면,


'정말 어쩌다 이렇게 돼 버렸는지..'


싶은 순간들도 있고,

 

'인생 뜻대로 되지 않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들도 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원망하던 때도 있었다.


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도 여러차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 중에는 복구가 불가능한 일도 있었고,

복구가 불가능해보였던 일이 회복된 경우도 있었다.


태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면 후유증이 말도 못한 경우도 있고, 의외로 아무 변화도 가져다 주지 못한 경우도 있다.


크고작은 태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지금,

앞으로 또 얼마만큼의 태풍이 지나갈 지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걸 뭉뚱그린 게 내 인생이니까"


라고 담담하게 얘기하며 받아들이는 영화 속 대사에 동조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삶을 살고 있다.

                       ㅡ 배우 '키키 키린'의 인터뷰 中


내가 어린 시절 그려왔던 모습이 아니어도,

간절히 원했던 꿈을 이루지 못했어도,

이루기 힘든 이상을 다시 품고 있다 해도


'아~차가 맛있구나'


'아~ 무사히 태풍이 지나갔구나'


라고 생각한다는 그녀처럼

사소한 일상에, 그리고 무사히 지나온 일상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어떤 현실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기에.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행복이란 것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는 거란다. 인생이란 건 단순해.”


 


<태풍이 지나가고> 엔딩곡,
                                   하나레구미의 '심호흡'

http://naver.me/FOPoIAfe


꿈꾸던 미래가

어떤 것이었건


잘가,

어제의 나..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영화를 추천해주신 흑설탕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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