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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이 Feb 28. 2017

절망의 끝에 찾아오는 구원의 기회 《포기의 순간》

ㅡ 불의의 사건을 겪은 이후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우리 모두의 내부에는 감추어야 할 어떤 것,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는 어떤 비밀이 있다.'


프랑스 소설가 필립 베송의 장편소설 《포기의 순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끼는 안개는 마을의 모든 것을 뒤덮고 늘 우리를 따라다닌다.
아마 우리가 죽는 날도 그러리라.


늘 안개에 뒤덮여있고 겨울에 점령당한

휑하기 그지없는 영국 해안가 어느 마을 '팰머스'.


마을을 떠나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떠나지 않을 이곳 사람들은, 그들을 떠나 멀리 가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을에 살고 있던 한 남자가 있다.


나에게는 나이가 없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나이를 잃었다. 행복했던 시절만 셈한다면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일 것이다.


불행한 시절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어린 시절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이후)주인공. 그의 이름은 '토머스'이다.


그는 폭풍우 속에 배를 타고 나갔다가 여덟 살 아들을 바다에 빠져 죽게 했다는 '과실치사' 혐의로 팰머스를 떠나게 됐고 오 년 후 다시, 팰머스로 돌아왔다.


마을의 풍경도 사람들도 변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파도 소리, 바람 냄새마저..

하지만 그는 이제 이방인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더이상 팰머스의 자식이 아니다.

그는 팰머스가 더는 원치 않는 잉여인간이다.

'자식을 죽인 팰머스의 살인자'일 뿐이다.

벽 바깥으로 내쳐졌던 사람에게는 되돌아오는 것도 금지된 것일까.


나는 과거와 함께 돌아왔고, 과거는 내가 짊어진 짐이다. 마을에 들어온 사내들이 나를 데리러 오기 전에 일어났던 사건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아무리 모든 연을 잘라내고,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모든 줄을 끊어봐야 소용없다. 새롭고 순결한 모습으로, 새것으로 번쩍거리는 나로 아무리 가공해봐야 소용없다. 이곳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리는 유의 인간이 아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들은 내 죄를 사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들 세계의 한 사람이었던 시절조차 이미 바깥에,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렇다. 나는 늘 이렇게 약간 물러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나에게는 항상 이런 꼴사나운 면과 약골처럼 맥없고 젖비린내가 날 것처럼 가녀린, 병자 같은 구석이 있었다.


주변과 가장자리를 좋아하는 그의 모, 중심을 경계하고 사람들 시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그의 모습이 마치 '나'를 보는 듯하다.

그는 이 곳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그 무엇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를 더욱 강하게 옭아매는 것은 뿌리 깊이 박힌 우리 본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과거이다. 일단 자신의 진실에 닻을 내리면 빠져나갈 수 없고, 자신을 옥죄는 것을 벗어버릴 도리가 없어진다. 저항하거나 싸워봐야 소용이 없다. 그저 단념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아마도 사람들이 내게서 보는 것이 바로 이 체념일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자식을 잃은 아비는 보이지 않는다. 자식을 살해한 아비만 보일 뿐.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확인된 사실뿐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 그 사람이 어린아이라는 것, 그 어린아이가 여덟 살에 불과했다는 점..


사람들은 금발의 곱슬머리와 제 어미를 닮아 다갈색 주근깨가 가득한 이 천진하고 해맑은 어린아이만을 볼 것이다. 한순간의 불찰로 무참히 짓밟히고 스러진 아이의 여덟 살만을 볼 것이다. 이 죽음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바로 내 아들의 죽음.


하지만 사람들이 아는 것, 기억하는 것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다.

'나'만이 완전한 진실을 밝힐 수 있다. '누군가'에게 이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는 이상.


절망의 심연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더이상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온기 가득한 빛이 아니다.


회색빛. 지독히도 더러운 창유리에 걸러진 회색빛이 닫힌 집 안으로 어렵사리 스며들어와 수염이 웃자란 내 볼에 얹힌다.
그것은 차라리 이제는 깨어날 시간임을 알리는, 이제는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로 돌아가 세상이라는 사진 속으로 들어갈 시간임을 알리는 알람이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정상이나, 속은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맞은 것처럼 만신창이다.


절망에는 필연적으로 그 본연의 이유가 있다.


그녀, '메리앤'에 대한 기억이 그를 또다시 충격에 휩싸이게 한다.


열세 살의 메리앤. 그녀는 내 한심한 다리와 계집애처럼 비쩍 마른 몸과 허약함을 놀리는 아이들로부터, 그들의 조롱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었다.

열일곱 살의 메리앤. 나는 그 전까지 여자아이와 키스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스물한 살의 메리앤. 그녀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내 팔에 안겨 이 집의 문턱을 넘었다.

서른다섯 살의 메리엔. 그녀는 팰머스에서도, 내게서도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를 떠나면서 그녀는 아주 작은 물건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가져가버렸다. 그에게 황량함만 남겨놓은 채.

내게도 황량함이 인생의 유일한 동반자라 생각하고 꼭 붙들어 안고 지내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숨죽여 지내며

존재하는 듯 사라질 듯 그렇게.


머물 것인지 물러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해야 한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모두, 용기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침묵으로 덮어야 하는, '침묵과 벙어리 행세라는 대가를 치르고야 얻을 수 있는' 평온이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들녀석이 머릿속에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는 시체가 아니라, 길을 건널 때 내 손을 꼭 잡는 사내아이의 모습으로만 나타나게 된 지 몇 해가 지났다.
그럼에도 이미지가 너무나 선명하다. 즉 바로 여기, 이 벽들 사이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울리고 있고, 성난 바다에 삼켜지기 위해 떠났던 바로 이 공간에 아이가 다시 나타났다.  


그가 정말 순전히 예기치 못한 실수로 아들을 죽게 만든 줄 알았다. (폭풍우 속에 아이를 데리고 배를 탔다는 거 자체가 예견된 살인 행위였음을 뒤늦게 깨닫 나는 몸서리를 쳤다.)


그 어떤 확신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시작된 그녀(메리앤)와의 결혼 생활은 결혼한 지 몇 달 후 태어난 아이조차 기쁨이 아니라 그에게는 뭔가 어긋난 결과일 뿐이다.


나는 갓태어난 아기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묵직했다. 아이와 의 첫 포옹에서 몇 초만에 중력을 느낀 것이었다. 이 중력은 아이가 살아있던 팔 년 내내 나를 따라다니다가, 정확히 아이가 배에서 떨어진 순간에 떠났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처지의 인물인 '라지브'에게 감춰온 충격적인 사연을 털어놓는다.


"죽은 아이는 물론 제 아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는 오래전부터 직감하고 있었던, 불임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던 그때 이후의 심경 변화를.


메리앤은 알고 있었을까? 나는 이 수수께끼와, 절대 던져본 적 없는 질문과,
절대 얻어본 적 없는 대답과 함께 사느라 기진맥진했다. 아이의 친부가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과, 아이가 탄생하는 데 아무 일조도 못한 자, 아이를 수정하기 위한 행위를 다시 연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한 남자에게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그는 그들 부부 사이에 자리잡은 침묵이 암덩어리처럼 모든 것을 잠식하고 고약한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결혼 생활이 썩어가고 있는 것으로 여겼으며,  벗어날 수 없는 굴레(팰머스의 남자와 여자는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는다는 맹목적인 논리에서 나온)라는 낭패감이 결국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리고 파경의 진짜 내막은 권태에 있었다는 말을 덧붙인다.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길 멈췄다. 서로를 염려하는 것을, 상대 때문에 가슴 떠는 것을 멈추었다. 더는 욕망이나 애틋함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이의 탄생은 집 안에 새로운 활기가 아니라 또다른 혼란을 가져왔다. 더구나 아이는 비합법적 사랑의 열매였다. 메리앤은 집에서 얻지 못한 것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간의 잦아지는 짜증, 일상에서 쌓인 분노의 감정, 비루함과 악다구니 속에서의 다툼, 깊어지는 원한의 감정들..


만일 우리가 터무니없는 계획일지라도 세워보기나 했더라면, 이 마을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해 다른 삶을 꾸릴 것을 고려해보기라도 했더라면..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결코 해본 적이 없었고, 우리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독기만 깊어갔다.


상대의 존재를 참을 수 없고, 목소리조차 참기 힘든 그런 감정은 서로의 시선과 각자가 고집하는 침묵 속에 느껴진다. 그러다 침묵이 깨지면, 여지없이 시비를 걸고 원망하는 말들이 튀어나온다. 꾹꾹 눌러담았던 모든 말들이 폭발한다.

그들 사이에 있는 아이는 그들의 일시적인 기분과 심술에 따라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가여운 신세가 된다.


아이가 있기 때문에...얼마나 많은 결혼이 오로지 이 한 문장 덕분에 유지되는가.
얼마나 많은 남자와 여자가 모든 매듭이 풀어졌음에도, 자식 때문에 같이 살며 끈을 붙들고 있는가.


그리고 그는 극단적인 생각에 이르게 된다.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고. 죽음만이 마침내 우리를 끝장내줄 수 있을 거라고.


"아이가 죽지 않았더라면, 저는 결코 팰머스를 떠나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없어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솔직히 그러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용기가 없었어요. 결국 제가 아직도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는 건 비겁하기 때문입니다"

"메리앤을 없앨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나를 붙든 것은 놀랍게도 사랑의 추억이었어요.  행복했고 발랄했던 시절에 대한 추억과, 학교 운동장에서 메리앤이 내 한심한 다리를 놀리던 아이들에게서 날 보호해주었던 기억. 이 어렴풋한 서광이 나를 가로막았어요"

"그러고 나니 남은 건 아이였어요.
내 아들이 아닌 그 아이, 메리앤의 부정으로 맺힌 열매, 내 무능의 이면."


리고 나서 그는 모두가 말리는 험한 날씨 속 아이와 함께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출항한다는 사실에 잔뜩 들떠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신이 나 있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막상 배 위에서 그는 어린아이 목숨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은 이미 늦었다.

구명조끼를 벗어버렸던 아이는 빗물과 파도의 거품에 쓸려 축축한 갑판 위에 미끄러졌고 그가 달려가 끌어 안았지만 아이의 몸에서 이미 모든 생명이 떠난 후였다.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죽은 아이를 부둥켜안고 있었을까.
아이가 죽은 순간은 소름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나지만, 그 뒤에 일어난 모든 일은 흐릿하고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다. 의심을 사고도 남을 말이지만, 엄연한 진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어떤 이유로도 아이를 희생시킨 일은 정당화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메리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녀(메리앤)는 그를 고소했고 그에게는 과실치사죄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그는 팰머스를 떠나기 위해 선고받기를 원했고 과거와 끝장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재판 결과를 받아들였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 해방감은 감옥 안에서 다시 한번 산산이 무너진다.

발작과 실성, 세 번의 자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와의 만남이 그의 발작과 자해를 멈추게 했다.


그의 존재감과 발걸음과 침묵 속의 뭔가가 안도감을 주었고, 일종의 거침없으면서도 거리를 주는 듯한 초연한 태도가 힘을 발산했다. 그 힘은 검은 눈동자에도 깃들어 있었다.

지금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내 삶을 붙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적인 것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아주 작은 한 걸음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또는 누군가가 나를 붙들어주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곁에서 위안이 되어주는 누군가를 만나 다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설계하고자 한다. 자신의 의지와 확신을 갖고 선택한 삶을.

결말에서 영화 <아가씨>(두 인물을 이어주는 내밀한 과정은  <아가씨>가 훨씬 밀도 있고 개연성 있지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구원자 나의 동무, 숙희..'


이 소설에서 그(토머스)에게 구원자는 '루크'였다.


그는 지금,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앞두고 서 있다. 두번 다시 없으리라 생각했던 기회를 잡기 위해, 구원을 찾기 위해.


한계에 다다르고 돌아올 수 없는 지점까지 내몰렸을 때, 나에게도 나를 구원해 준 친구, 그녀가 있었음을 떠올린다. 차마 입 밖에 꺼내기 두려운 비밀과 진실을 그녀 앞에 털어놓고(그녀와 지내온 시간과 그녀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그녀의 위안에 살아갈 용기를 다시 얻었다. 그녀가 되찾아준 삶이지만 내 삶은 다시 내가 꾸려 나가야 한다.


누군가와 함께 하든, 각자의 길을 가든

그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되는 삶길 바란다.


아이의 죽음이라는 소재를 풀어내는 어떤 부분들에 있어서 거부감과 반감이 들지만, 이 소재의 상징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불의의 사고, 포기의 순간'을 대변해주는 것은 아닐는지.


'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불의의 사건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라고 한 저자의 물음처럼 질문을 던져본다.

자신만의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불의의 사건이 필요악인 것일까.

의문도 품지 않고 누구나 으레 그러니까 하는 심정으로 끌려가던 삶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혹독한 계기가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내 인생에도 불의의 사건이 있었고, 혹독한 계기가 있었다.

더 잃을 것도 더 바랄 것도 없었던 모든 것을 놓아버린 포기의 순간엔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다. 그런 폭풍우를 지나 지금의 내가 있는 거겠지만,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이다. 그렇기에 남은 날들은 더 신중하고 소중하게 살아가야 한다.

절망의 끝에서도 희망의 기회는 오고, 희망은 스스로의 의지로 찾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포기의 순간》 (초판 발행 2011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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