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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이 Apr 06. 2017

하나가 되는 삶의 조각들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ㅡ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미치 앨봄,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2010년 개정판)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저자 미치 앨봄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초판 1쇄 2004년 1월 10일



이 책은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죽음은 끝인 동시에 시작이다. 다만 우리가 볼 수 없을 뿐.

'끝이면서 시작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에디는 바닷가에 위치한 오래된 놀이 공원 '루비 가든'의 정비공이었다. 그는 전쟁에서 다친 무릎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다녔고, 기계를 다루다 골절상을 입어 손가락들은 흉하게 굽어 있었다.

누구나 '진정한 사랑을 만난 순간의 스냅 사진 같은 장면'이 있듯이 그에게는 마거릿이 그런 존재였다.

그는 두 사람을 함께 엮어주었던 노래를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그녀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철썩,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와아!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인다.


사람들은 마지막 말을 어떻게 선택할까? 그 말의 무게를 알고 있을까? 또 그 순간 현명한 말을 하게 될까?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맞이하게 되는 죽음이라면..


83살의 생일날,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물러서요!'


였다.


추락하는 놀이기구 밑에 있는 소녀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던 그 순간이 지상에서의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순간, 에디는 온 세상 소리를 다 듣는 것 같았다. 멀리서 들리는 비명 소리, 파도 소리, 음악 소리, 바람이 밀려오는 소리. 낮고 시끄럽고 거슬리는 소리는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그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소녀가 양팔을 휘저었고 에디는 달려갔다...

아찔한 충격.

앞이 안 보이게 번쩍하는 빛.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지...?

어디일까...?'


끔찍한 순간을 다시 떠올려봤지만 그저 평온함만 밀려들 뿐 어떠한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


물. 큰 바다. 광활한 바다 위를 떠가고 있던 그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수면을 향해 밑으로. 그리고 모든  게 조용해졌다.


'걱정과 근심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통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첫 번째 만남 (인연의 장)


구식 놀이기구인 회전 찻잔 속에서 잠을 깬 그는 지팡이 없이 몸을 일으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75년 전의 루비 가든이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몸은 유연하고 가벼웠다.

전쟁 이후로 60년간 제대로 뛰어본 적 없는 그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누구나 가슴 한 구석에는 '신나게 달리는 아이'였던 시절이 있었을테니까.


그리고 온통 파란색 몸인 사내와 만나게 된다.

이 곳이 천국이라고 말하는 파란 사내의 말을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돼.. '


평생 몸담고 일했던 곳인 동시에 벗어나려고 애를 썼던  한낱 놀이 공원이 천국이라니.


파란 사내가 말한다.


"아, 그래요.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고 지낸 곳을 얕잡아보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천국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 있어요.

천국에서 만나는 다섯 사람은 모두 당신의 인생에 결부되어 있지요. 천국은 지상에서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 있는 거랍니다.

내가 죽었을 때 다섯 사람이 내 삶을 조명해주었고 당신도 또한 그렇게 될 거예요. 그 중에는 알던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모두 죽기 전 당신 인생과 얽혀 있지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일어난 일을 두 가지 각도에서 보자.

이쪽에서 보면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에디와 파란 사내의 인연이 그랬다.

어린 시절 공놀이를 하다 길에 뛰어든 에디는 사고를 모면했지만 운전 중이었던 파란 사내는 그를 피하려다 죽음을 맞게 되었다.


천국에서라도 자신을 죽게 만든 죄값을 치르겠다는 에디에게 파란 사내는 이 곳에 온 이유는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우연한 행위란 없다. 우리 모두는 결국 연결되어 있다.

파란 사내는 자신의 장례식 장면을 보여준다.


"왜 사람들은 남이 죽으면 모일까요. 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그건 모든 삶이 서로 엮여 있다는 걸 영혼 깊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요. 죽음은 그저 어떤 사람을 데려가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 옆을 슬쩍 비켜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둘의 생사가 엇갈리는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나지요.

우린 그런 일들이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지요. 하나가 시들면 다른 하나는 자라나요. 태어나고 죽는 것이 전체의 일부분이고요.

...타인이란 아직 미처 만나지 못한 가족일 뿐이에요."



두 번째 만남(희생의 장)


파란 사내는 사라져버리고 에디는 참혹한 전쟁터에서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대위를 만난다.

대위는 어떤 일이 있어도 부대원을 남겨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죽음을 택했다.

에디는 적군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리고 그의 다리에 총을 쏜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게 된다.


"우리 모두 희생을 한다네. 자네는 희생을 하고 나서 분노했지. 잃은 것에 대해서만 계속 생각하겠지만 희생은 후회할 것이 아니라 열망을 가질 만한 것이라네.

때로 소중한 것을 희생하면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걸 다른사람한테 넘겨주는 것이지.

난 자네를 쐈네. 그리고 자네는 뭔가 잃었지만, 또 뭔가를 얻었지. 자네가 아직은 그걸 모르지만. 나도 뭔가를 얻었네."


에디는 아래를 보았다. 철모 안쪽에 든 구겨진 여자 사진. 가슴이 저려왔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때 대위는 사라지고 없었다.



세 번째 만남(용서의 장)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에디의 몸이 붕 뜨더니 따뜻한 공기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이번엔 어디일까?

좁은 산마루 밑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쫓아가다 보니 눈밭에 마차 모양의 건물 하나가 있다.

식당. 그 곳에 그의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무관심, 폭력, 침묵으로 에디에게 상처를 입혔던 아버지는 천국에서까지 아들을 모른 체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어떤 아이든 깨끗한 유리처럼, 보살피는 사람의 손자국을 흡수하게 마련이다. 어떤 부모는 유년기의 유리에 손자국을 내고, 어떤 부모는 금가게 한다. 몇몇은 유년기를 완전히 산산조각내서 다시 맞출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의 눈 앞에 한 노부인이 나타났다.

천국에서 만나게 되는 세 번째 사람인 그녀는 생전에 에디가 자라던 바닷가 부근의 음식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녀의 이름이 바로 에디와 아버지의 일터였던 루비 공원의 '루비'였다. 루비 공원은 오래전 노부인의 남편인 에밀이 그녀를 위해 지은 놀이 공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살아있었을 때의 이야기를 에디에게 들려준다. 그가 묻는다.


"그런데 전 이해가 안 갑니다. 혹시 우리가 만난 적이라도 있습니까? 부인의 사연이나 놀이 공원에 화재가 발생한 일이나 모두 제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잖습니까?"


노부인이 그의 의문에 답한다.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앞서 산 사람들이 영향을 미치기도 하구요. 우리가 매일 다니는 곳은, 우리 이전의 사람들이 없었다면 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에밀이 없었으면 난 남편이 없었을 거예요. 우리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루비 가든은 없었을 테지요. 가든이 없었다면 당신이 거기서 일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요."


노부인은 이어서 에디의 아버지가 죽게 된 진짜 연유를 말주고, 비로소 에디는 분노를 내려놓고 아버지를 용서하고자 한다.



네 번째 만남(사랑의 장)


루비는 '만날 사람이 아직 두 사람 더 있다'고 했다. 그런데 뭐지? 등 아래쪽이 뭉근하게 아파왔고 다친 다리가 점점 뻣뻣해졌다. 천국의 새 단계에 들어갈 때마다 일어나는 증세였다. 몸이 썩어가고 있었다.

쭉 나 있는 문 중 한 개를 열었다.

결혼식 피로연장. 그는 정비공 셔츠를 입은 채 그 곳을 돌고 있었다. 이게 그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보라색 롱드레스를 입고 말린 꽃이 달린 모자를 쓴 신부 들러리가 사탕 바구니를 들고 하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와 사탕을 내밀며 물었다.


"씁쓸한 일과 달콤한 일을 위해 사탕 하나 드실래요?"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한쪽 눈 위로 흘러내리자, 에디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마거릿..."


에디는 젊은 마거릿을 빤히 바라봤다. 결혼할 당시처럼 젊고 아름다운 그녀가 다시 여기 있다니..그는 믿을 수 없었다.


"당신이 아냐. 당신이 아니라구. 아니야."


그는 마거릿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죽은 후 처음으로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예전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그의 흉터를 바라보며 에디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많이 희어졌네요."


에디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것 외에는 꼼짝할 수 없었다. 마거릿은 그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나이 들고 고생했던 마지막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져주자 에디의 몸에 따스한 기운이 퍼졌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한다.


"당신을 기다렸어요."


숨어있던 슬픔이 일어나서 심장을 거머쥐듯, 그의 영혼에 옛 감정이 파고들었다. 에디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느낌은 잃었던 모든 것의 물살로 흘러들었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죽은 아내. 젊은 아내. 그리웠던 아내. 단 하나뿐인 나의 아내..


"마거릿..미안해. 정말 미안하오. 말할 수가 없어. 못 하겠어. 말을 못하겠어...정말로 보고 싶었소."


행운과 불행 사이..


그 두 사람이 살아있었을 때,

에디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그들은 아이를 입양할 비용이 필요했고, 마침 에디는 경마장에서 돈을 따고 있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불행을 비껴갈 수 있었을까?


에디는 마거릿에게 경마에서 돈을 땄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도박을 하는 남편이 마음에 걸려 전화를 끊자마자 경마장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하지만 이날 밤, 경마장 가는 도로 위 육교 위에 사람이 있었다. 10대 두 명. 그 둘은 술을 마시고 담배까지 펴 대며 육교 밑으로 술병을 떨어뜨리는 미친 장난을 하고 있었다.

술병이 지나가던 차를 비켜 도로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그리고 또 한 병..이번에는 지나가는 차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그녀의 차 앞창으로.


차가 콘크리트 분리대에 부딪쳤다. 그녀의 몸은 인형처럼 솟구쳐 문에 부딪힌 다음, 계기판과 운전대에 내동댕이쳐졌다. 내장이 찢기고 팔이 부러졌으며, 머리를 세차게 부딪치면서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저녁의 소리도, 차들이 내는 끽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요란한 경적소리도, 육교에서 아이들이 달아나면서 내는 고무 밑창이 끌리는 소리도. 그들은 레스터 가의 육교를 지나 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마거릿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그녀는 거의 반 년간을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 했으며  입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랑의 물은 뿌리 깊숙이 숨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마거릿은 40대 중반의 나이가 됐고 마음의 상처도 천천히 아물어 갔다. 사랑의 물결이 발밑에 모여드는 바닷물처럼 그들을 적셨다.


더이상의 불행은 없길 바랐는데..


3년이 지난 해, 마거릿은 뇌종양으로 쓰러지고 힘겨운 사투 끝에 그녀는 마흔일곱 살의 생을 마쳤다.


천국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에디는 그녀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고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이 죽고 난 모든 걸 잃었어. 내가 사랑한 유일한 여인을 잃었어."


"아뇨, 당신은 잃은 게 아니었어요. 난 바로 여기 있었어요. 잃어버린 사랑도 사랑이에요, 여보. 다른 형태를 취할 뿐. 가버린 사람의 미소를 볼 수 없고, 그 사람에게 음식을 갖다줄 수도 없고, 머리를 만질 수도 없고, 같이 춤을 출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런 감각이 약해지면 다른 게 환해지죠. 추억 말이에요. 추억이 동반자가 되는 거예요. 당신은 그걸 키우고 가꾸고 품어주고. 생명은 끝나게 마련이지만 사랑은 끝이 없어요."


마거릿은 다시 그의 품에 안겼고 귀에 익은 멜로디가 들려오자 그녀는 노래를 따라불렀다.

두 사람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 기억하는 리듬에 따라서.

에디는 눈을 감고 처음으로 그녀를 다시 봤을 때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난 가고 싶지 않아. 여기 머물고 싶어."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 마거릿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섯 번째 만남(화해의 장)


온통 흰색뿐이다. 땅도 하늘도 없고, 순수하고 고요한 흰빛만 있다. 그는 마거릿을 간절히 원했지만 가버렸다. 1분만, 30초만, 아니 5초만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지만, 손을 뻗을 수도 부를 수도 없다. 그는 공허 속에 있었다.

하루? 한 달? 아니 1백년쯤 그렇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떨리는 소음에 에디는 눈을 떴다.

팔뚝에는 검버섯 같은 게 생겨났고 손톱은 작고 누랬다. 다리에는 죽기 몇 주전  지상에서 생긴 붉은 자국, 대상포진이 있었다. 그는 시들어버린 자신의 몸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인간의 몸으로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살아있을 때 악몽 속에서 들었던 소리가 났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그 기억에 몸이 떨렸다. 마을. 화재.

발 아래 땅이 나타났다. 지팡이가 단단한 것에 닿았고 에디는 강둑에 서있었다.

수천 명의 아이들이 강에서 물싸움을 하고 순진한 웃음을 와락 터뜨리고 있다.

에디는 아이들의 작은 몸집을 찬찬히 보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 아이가 에디 쪽을 쳐다보고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갑자기 등에 바람이 불어 그의 몸을 밀어주었고 그는 어린 소녀 앞에 서게 되었다.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갈색 피부와 까만 머리, 납작한 코, 벌어진 이, 큼직한 입술. 그 중 물개처럼 까만 눈이 가장 눈에 띄었다. 아이는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의 이름을  얘기한다.


이 소녀는 생전 그와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걸까.

그와 대화를 주고 받던 소녀가 말한다.


"아저씨가 날 태워요. 불 나게 해요. 우리 엄마가 숨으라고 해요. 군.."


에디는 그 말을 듣자 혀에 칼이 꽂힌 기분이었다. 머리에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병사들. 폭발. 대위. 화염 방사기.


"그때 넌 필리핀에 있었구나..그림자 속에..그 오두막에.."


오랜 세월, 그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던 어둠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도 생생하게. 이 아이. 이 사랑스런 아이. 그토록 힘들게 했던 나쁜 꿈들..그래, 그때  봤던 뭔가가 허상이 아니었다. 불길 속의 그림자. 이 손으로 죽이다니. 이 거친 손으로. 손가락과 영혼 사이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한참동안 그는 검은 머리 소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소녀가 물 속에 들어가서 등을 돌리더니 씻어달라고 했다. 에디는 심하게 화상을 입은 아이의 피부를 보고 움찔했다. 그는 까맣게 그을린 아이의 손을 잡고 돌멩이를 아이의 팔에 문질렀다. 상처가 흐물흐물해지면서 벗겨져 나갔다. 그을린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새살이 돋았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 온 아이는 다섯 손가락 펴 에디의 가슴에 댔다. 당신의 다섯 번째 사람.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에디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늘 하던 말을 했다. 마거릿에게, 루비에게, 대위에게, 파란 사내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난 살면서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헤매고 다녔지. 난 그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었어."


소녀 그에게 말한다.


"거기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거기가 아저씨가 있어야 될 데였어요."


에디는 흐르는 물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형체가 녹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소녀에게 물었다.


"루비 가든에 있었던 어린 소녀 있지? 내가 그 애를 구했니? 아이를 끌어냈어?"


"아니, 안 끌어냈어요. 밀었어요."


"밀어?"


"네, 끌지 않고 밀었어요. 큰 게 떨어졌어요. 아저씨가 애를 안전하게 구했어요."


"하지만 내가 끌어낸 아이의 손길을 느꼈는데, 기억나는 건 그것뿐인데."


소녀는 생긋 웃으며, 작은 손으로 에디의 손을 잡았다. 전에도 잡아본 그 손의 느낌이었다.


"그 애 손이 아니라 내 손이에요."


그 말과 함께 강물이 불어 에디의 허리와 가슴, 어깨까지 잠겼다.그는 거세면서도 조용한 물결에 휘감겼다. 여전히 소녀의 손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그의 영혼에서 몸둥아리가 씻겨나가는 것을 느꼈다. 살이 뼈에서 떨어지고 그와 함께 안에 있던 모든 고통과 연약함이 사라졌다. 모든 상처와 흉터, 나쁜 기억까지도.

아이는 그를 끌고 잿빛 바다의 부서지는 파도를 지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수천 명이 모인 루비 가든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아이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이 나란히 손에 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거기 있었다. 아니, 에디가 살면서 했던 간단하고 평범한 일 덕분에 그곳에 있게 될 터였다. 그가 막은 사고 덕분에, 그가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준 전환점 때문에.

이제 그는 소녀의 손을 놓고, 둥둥 떠올랐다. 나무 산책 위로, 천막 지붕 위로, 놀이 공원 첨탑들 위로. 거기 노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그의 아내 마거릿.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내밀고 기다리고 있었다. 에디는 아내에게 손을 뻗었다. 목소리들이 신에게서 온 한 마디로 녹아들었다.

집.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이야기


루비 가든에 줄이 생겼다. 다른 곳에 생긴 줄과 똑같은 줄이었다. 그가 구한 여자 아이도 자라서 사랑을 하고, 나이 들고 이 곳으로 올라와 다섯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녀 또한 '왜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게 되겠지.


나와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 내가 느끼는 감정들..

나도 언젠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그것들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까.


이제 그 줄에 한 노인이 천국의 비밀을 나누기 위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무의미한 생은 없다.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다른 사람은 그 옆의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세상에 사연들이 가득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결국 하나가 되어 만난다.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은 내 삶에 또 나의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도 못할 거 뭐' 라는 생각보다는 '뭔가 조금은 달라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

물론 책 속을 빠져 나와 다시 돌아온 현실은 여전히 너무나도 고달픈 나날들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우울한 생각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기에 다시 희망의 끝자락을 붙잡아 본다.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질지 모를 이 생에서의 인연.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삶의 조각들이 소중하게 채워지기를.



* 긴 글, 책이야기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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