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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에 대한 기억

by 책사이

연필 애호가 정희재 작가님의 책 《다시 소중한 것들이 말을 건다》를 읽고 있으니 문득 연필과 관련된 선명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을 거다. 무조건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 사각 필통에 가지런히 넣어가지고 다니던 때였다. 뾰족하게 깎인 연필로 책받침 받힌 공책에 글씨가 가늘고 깔끔하게 써지는 느낌을 좋아했다.


그 당시 여자애들을 짓궂게 괴롭히던 남자애가 있었다. 이름을 우습게 만들어 부르는 건 예사고(끝에 ‘순’으로 끝나는 애는 ‘순대’이런 식으로) 누구네 엄마 키가 작다고 난쟁이라고 놀리거나 머리를 양쪽으로 총총 땋고 오는 날엔 힘껏 잡아당기고는 모른 척 한다거나. 암튼 그 애 때문에 교실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리본 달린 검정 구두에 하얀 원피스 이쁘게 차려입고 학교 간 날이었다. 점심 시간, 놀려대는 그 애를 잡는다고 운동장에서 뒤쫓아 달리다가 그만 흙바닥에 쫙 미끄러져 오른쪽 바깥 허벅지가 완전히 갈려 양호실로 직행했다. 치료받고 교실로 돌아와(하필 걔가 내 짝꿍이었다.) 나는 맨 뒤에 있는 그 애 옆자리에 앉아 필통에서 뾰족하게 깎은 연필 한 자루를 꺼내 쥐고는 뭔가를 쓰고 있었다.

(아마 속상하고 억울하고 눈물이 막 나려는 감정을 꾹꾹 참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 애가 옆에서 깐족깐족 말을 걸며 내 오른팔을 툭툭 건드렸다.

순간 화가 난 나는,

“건들지 말라고!!”

소리를 치며 연필 든 오른손을 확 쳐 올렸다.

연필심이 순식간에 그 애 얼굴 왼쪽 볼을 쫙 긋고 지나갔다. 까만 연필심이 지나간 자리는 벌겋게 한 줄로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뾰족했던 연필 끝을 내려다보니 부러져 있었다. 걔도 나도 서로 당황하여 한동안 입을 다물고 쳐다보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나 반 친구들이 별로 신경쓰지 않은 걸 보면 그 애 볼에 낸 붉은 자국이 다행히도 금방 가라앉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날 서로에게 있었던 사건을 그 애도 나도 부모님께 사실대로 얘기 안 드린 거 같다.

그 애는 그동안 놀려먹은 게 많아서였는지, 내 허벅지에 상처 낸 일 때문이었는지, 여자애한테 얼굴 긁힌 게 창피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너무 무서워서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던 거다. 내 허벅지 상처가 훨씬 컸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얼굴에 연필심이라도 박혔으면 어쩔 뻔 했나, 눈이라도 찔렸으면 어쩔 뻔 했나, 걔가 똑같이 복수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지냈으니까. 다행히 그 남자애는 더 이상 날 건드리지도 놀리지도 않았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연필을 뾰족하게 깎지 않는다. 아이가 쓰는 연필을 깎아줄 때도 뭉툭하게 깎아준다. 그리고 신신당부를 한다. 연필 쥐고 절대 장난치지 말라고.


결코 잊지 못하는 추억의 한 조각이 되어버린 그 일들 때문이 아니어도 이젠 뭉툭한 연필이 좋다. 쓰다 부러질 염려도 없고 누군가를 해할 염려도 없고. 아니, 지금은 연필 자체를 좋아한다. 책과 함께 연필을 끼고 산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밑줄 긋는 맛은 연필을 따라갈 만한 도구가 없다. 쓱쓱 종이 위를 지나가는 소리도 연필이 제일이다. 정희재 작가님 말씀처럼 종이와 연필심이 만들어내는 '사각사각'소리는 영혼의 귀를 든든하게 채워주기에 충분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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