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박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이 책은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책임에도 보신 분들의 리뷰도 많고 현재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는 책이다.
내 서가에 꽂혀있는《떠나고 싶을때 나는 읽는다》를 쓰신 여행가 박준 작가님의 신간인가 했는데 시인 박준 작가님이 내신 신간이다.
지난 일을 회고하고 경험과 연륜이 시와 산문에 녹아든 정도가 예사롭지 않아 나이가 많은 분인 줄 알았는데 1983년생이시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은 이전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처럼 길면서도 여러번 되뇌이게 되는 제목이다.
제목 뒤에는 '울면 뭐 어때요?'라는 속내가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박준 작가님은 책에 친필 사인을 할 때
"울어요. 우리"
라는 글귀를 쓰신다고 한다. '울지 마요'가 아닌 '울어요' 그것도 같이.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p. 157)
때로는 '울지 말라'는 말보다 울고 싶을 땐 '울어도 괜찮아' 라는 말이 훨씬 더 위로가 된다.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욱여넣기보다 한바탕 울고나면 속이 후련해지기도 하니까.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실컷 울고 나면 적어도 마음가짐은 달라진다. 훌훌 털고 일어날 의지가 생기기도 한다.
저자처럼 나역시 눈물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남편은 아이가 울면, 남자는 울면 안된다 강하게 키워야 한다 면서 아파도 혼나도 속상해도 울지 못하게 한다.
눈물을 꾹꾹 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울 때가 많다.
울음을 너무 참으면 속으로 곪는다.
약해 보이면 당하는 세상이라지만 꼭 눈물만이 아니라 감정까지 잃게 될까 두렵다.
'울면 좀 어때, 울어도 괜찮아' 라고 다독이면 오히려 더 씩씩해진다.
이 책에서 그런 공감과 위로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막 눈물 나게 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는 건 아니다. 어떤 소재에 대한 상념, 자신과 주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바를 짧은 시 또는 산문으로 담담하게 써내려간 문장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공감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유서처럼 그 수많은 유언들을 가득 담고 있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밤이다.
(p. 19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 中)
삶을 살아오면서 타인에게 욕을 듣거나 비난을 받은 적이 간혹 있었다. 서로 오해가 쌓여 그런 적도 있었고, 물론 내가 명백하게 잘못한 일도 많았다. 분명한 것은 내가 들었던 욕이나 비난들은 대부분 말로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오해가 풀리거나 화가 누그러졌을 때 종종 상대에게 사과를 받기도 했는데, 생각해 보면 이러한 사과는 말보다 글을 통해 받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짧은 분량이라도 사과와 용서와 화해의 글이라면 내게는 모두 편지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떠한 양식의 삶이 옳은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편지를 많이 받고 싶다. 편지는 분노나 미움보다는 애정과 배려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늦은 답서를 할 것이다. 우리의 편지가 길게 이어질 것이다.(p. 26 '편지' 中)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p. 110 '일상의 공간, 여행의 시간' 中)
어떤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아도 쓰이는 일만으로 저마다의 능력과 힘을 가지는 것이라 믿는다. 마치 마음속 소원처럼, 혹은 이를 악물고 하는 다짐처럼. (p. 180 '순대와 혁명' 中)
아무리 무겁고 날 선 마음이라 해도 시간에게만큼은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 여긴다. 오래 삶은 옷처럼 흐릿해지기도 하며. 나는 이 사실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른다.
다시 새해가 온다. 내 안의 무수한 마음들에게도 한 살씩 공평하게 나이를 더해주고 싶다.
(p. 186 '내 마음의 나이')
한편, '그해 인천', '그해 경주' 등 그해..로 시작하는 제목의 짧은 시들에서는 저자가 혼자 또는 누군가와 머물렀을 공간과 장면을 떠올리며 그때의 감정과 함축적인 문장에 담긴 의미를 추측해본다.
그해, 너의 앞에 서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 입속에 내가 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p. 14 '그해 인천')
그해 밤 별빛은
우리가 있던 자리를 밝힐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눈으로 들어와 빛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p. 27 '그해 여수')
늦은 밤 떠올리는 생각들의 대부분은
나를 곧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p. 191 '그해 연화리')
그런 점에서 이 책의 표지 그림(기드온 루빈의 <Untitled>)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눈ᆞ코ᆞ입이 없는 그림 속 두 남녀의 모습에서 즐거운 표정인지 슬픈 표정인지 연인 관계인지 남매 관계인지 등 다양하게 상상이 가능하다. 해석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이런 점이 여러 생각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시와 잘 어울리기에.
이 책에 관한 저자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던 중 와닿는 말이 있어 옮겨본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달라지지 않는 세상이 분명 존재하잖아요.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는데요. 그럴 때 전 생각해요.
'달라지지 않을 줄 알았지만 그냥 한 거야'.
달라질 걸 기대하지 않고 하는 일들이 많아졌으면 해요."
씁쓸한 현실이지만 달라질 리 없다고 처음부터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 상태일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달라질 걸 기대하지 않더라도'그냥' 마음 먹은 대로 해보는 거다. 시도하는 일이 많아지면 기대치 않은 변화도 생기기 마련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