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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이 동하다 May 20. 2024

20년간 장학금을 월급쟁이 곗돈으로?

넉넉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서 넉넉해지는 것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이 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럼 20년이면? 변해도 너무 변했을라나? 기억까지 변하진 않았겠지만 아마도 2003년도 즈음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게 2002년이니 직장인 2년차였을 무렵이다. 졸업과 동시에 대학 졸업동기 형, 친구들이랑 한 달에 한번 모임을 계모임을 하고 있었고, 계모임 이름도 ‘배신을 잘 한다’는 농담을 섞어서 ‘배신자클럽’으로 지었다. 졸업동기지만 나이도 학번도 다양했다. 96학번인 나를 기준으로 하자면 95학번도 있고 99학번도 있고, 3~4살 많은 형들, 1살 터울 형들 그리고 동갑내기 4명 포함 총 9명이다. 우린 모두 남자였다.




    지금의 MZ세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겠지만, 그 당시 우리들도 나름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신입이었다. 9명은 1개월마다 모임을 가졌지만 서로 바쁜 일상 탓에 9명이 다 모이기는 쉽지 않았고, 적게는 4명이 모일 때도 있었고 많으면 9명이 다 만날 때도 있었다. 직장이 병원이고, 당직이 있는 직업특성상 어쩔 수 없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 당시 중소병원(약 100병상)엔 대부분 응급실이 있었다. 야간진료가 있다는 말은 밤에 채혈을 통해 검사결과가 이루어져야 하고, 방사선 촬영을 통해 판독이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병원 야간엔 응급실 인원 외에도 임상병리사와 방사선사도 1명씩 당직을 섰다. 우린 모두 방사선사였다.


    내가 다닌 중소병원은 실장님 포함해서 4명이 근무했다. 당시 실장님은 1주일에 평일 당직 1개를 섰고, 나머지 3명이 한 달에 9개씩 27일을 책임졌다. 다른 동기가 근무하는 병원은 실장님이 아예 당직을 서지 않는다. 그럼 한 달에 10개 당직을 서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열악한 근무조건이었는데 그 당시엔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급여다. 당직비 빼면 월급이 100만원이 안되었고, 당직비 9~10개를 포함하면 겨우 110만원을 넘겼다. 우리들의 사회 첫 월급은 그렇게 쌓여져 가고 있었다.


    이런 급여는 내보다 더 앞선 선배 직장인들에겐 ‘라떼는 절반도 못 받았다.’라는 후일담으로 연결되고, 지금의 세대에겐 ‘실화임?’이라는 의문을 남기겠지만, 아무튼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당직 개수와 대략적인 급여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보지만 다른 눈으로 봅니다.
_박예진《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센텐스)


     어느 날, 이 모임에서 리더 격을 맡고 있는 형이 제안을 한다. 우리 계돈으로 1년에 한번은 학교 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건 어떻겠냐는 것이다.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대학병원이나 공공기관 등 좋은 직장에 일찌감치 취업해서 겸임교수나 외래 강사로 활동하고 계신 많은 선배님들도 있는데, 왜 굳이 우리가 장학금을 줘야하는지 의문이었다. 그것도 박봉인 급여를 받고 있고, 학교생활도 평범했고, 그야말로 보통의 방사선사인 우리가? 왜? 라는 반문의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형의 눈은 정확했다.



넉넉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서 넉넉해지는 것이다.
_신준모《어떤 하루》(프롬북스)


    의견을 제안한 형은 나름 학교생활에서 대의원장(정확한 명칭이 기억나질 않는다.)도 했을 만큼 학과 생활엔 진심이었던 형이다. 그 형 말로는 우리 학교 방사선학과는 나름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와 학과인데, 그 흔한 장학금제도가 없다는 것이다. 재학생들은 성적장학금이나 근로장학금만 있지 방사선학과만의 특별한 장학금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많은 돈은 아니더라도 곗돈에서 조금씩 모아 1년에 일정한 금액을 주자고 한다. 우리 같은 중소병원(9명중 7명이 중소병원 2명은 대형병원)에 다니는 보통의 방사선사들이 장학금을 전달하는 모습이 조금씩 알려지다 보면 학교차원에서도, 총동문회에서도 깨닫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한다는 뜻이다. 꼭 변화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단다. 나누어서 넉넉해지는 마음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어렵게 구한 20여년전 장학금전달 사진


    그 형의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우린 선한 마음에 자연스레 동의를 했다. 형은 며칠 뒤 학교 측에 정식을 의견을 전달했고 이듬해부터 시행했다. 학과에서 1명을 공정하게 선발해주었고, 날짜와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서 장학금을 전달해 주었다. 그렇게 2004년부터 매년 2학기가 개강하는 즈음에 우린 계돈을 털어 소소한 장학금을 전달했고, 한 해 두 해 쌓여져 강산이 두 번째 바뀌었다.




나무의 우듬지가 아래 가지들을 다스려 가면서 하늘을 향해 뻗어 가듯,
사람은 꿈이나 희망 등 살아갈 이유가 있어야만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이겨 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_우종영《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앳워크)


    ‘우듬지’는 나무줄기의 맨 꼭대기 부분으로 나무가 어느 방향으로 뻗어 나갈지를 결정한다. 지난 20년간 우리들의 모습이 학과의 방향에 도움이 되고, 하나 둘씩 장학금이 늘어났다는 소식을 어깨너머로 들었다. 나무의 우듬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좋은 방향으로 뻗어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게도 오타 발견 (배클장학회인데 배클방학회^^;)

    올 가을 2학기 때 있을 21회 배클장학금 전달이 끝이다. 그 마지막 한 번을 앞두고 지난 토요일 학교 측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20년 전 처음 모인자리에서 딱 20년만 해보자고 했던 게 정말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만 스무 해인 올해 스물한 번째 장학금 전달식을 끝으로 길고도 길었던 행사를 마무리하게 된다. 감사패를 대표로 수상 받은 형은 이 사진을 단톡방에 올렸고, 저마다 그동안의 말은 안했지만 모두들 수고했다고 칭찬의 댓글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다가오는 가을 마지막 장학금을 전달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곗돈을 모으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총무고 20년간 힘들게 비우고 채우길 반복했던 통장의 잔고를 조금씩 채워나가야 한다. 우리도 곗돈으로 해외여행 한번 가봐야지! 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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