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은 익숙함으로 두려움은 편안함으로 바뀝니다.
“아버지는 글씨를 이렇게 썼었어요?”
어느 날 저녁 작은 아들이 거실 테이블에서 공책에 필기하고 있는 나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렇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어른의 글쓰기를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짜인 각본에 의해 48번째 생일 선물로 책을 받았다. 올 봄에는 무엇에 꽂혔는지 ‘오십에 읽는 ◯◯’ 시리즈에 유난히 관심이 갔다. 아직 50에 1년하고도 무려 6개월이 남았는데 말이다. 내년 아홉수에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봐야할 책들이지만 1년 앞당겨 이 책들을 선택한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그건 또 완주하지도 못할 ‘필사’에 대한 끓어오르는 의욕이 문제였다.
어떤 영역이든 반복적으로 접하면
낯섦은 익숙함으로 두려움은 편안함으로 바뀝니다.
어려움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_이정훈《쓰려고 읽습니다》(책과강연)
몇 년 전인가 처음으로 ‘필사’를 선택했었다. 그 책은 어렵기로 소문나고 두껍기로 알려진 ‘칼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이다. 하루 몇 페이지씩 공책에 손 글씨로 적으며 모르는 단어에 밑줄을 긋고 찾아보는 식이다. 첫 며칠, 아니 보름에서 한 달 정도는 적었던 거 같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이해되지도 않는 《코스모스》 책을 펼치고 나름의 흥미를 찾아서 삐뚤빼뚤 적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전에도 언급했지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알렉산더 대왕에 대해 궁금했고, 거기서 시작한 호기심은 세계사로 우회전하며 나의 첫 필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두 번째 필사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다. 이 책의 구입에 관한 에피소드는 ‘내가 책을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브런치(2024.4월 소식지)에 올렸었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이 책을 이번에는 손 글씨가 아닌 컴퓨터를 이용해 필사하고자 했다. 손 글씨는 손목에 힘이 많이 들어가고, 조금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으로 편안함을 선택했다. 《코스모스》가 지식을 위한 필사였다면, 《자전거 여행》은 문장력, 어휘력에 도움이 될까해서 시작했다. 그런데 이 필사도 보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뒀던 기억이 난다. 이유는 따로 없었다. 자발적 글쓰기엔 부담 없는 퇴장이라는 스스로와의 협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필사는 E드라이브 어느 폴더에 2년째 잠자고 있다.
그리고 이번엔 세 번째 필사카드를 꺼내었다. 아이들에게 받은 책 6권을 오십이 되기 전에 모두 필사하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러니 1년 6개월이 남은 셈이다. 내년에 다짐했으면 현실 불가능했기에 1년 앞당겨서 시작했다. 이번 필사도 언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지 모른다. 아직은 15일째 매일 아침에 40~50분가량 필사에 성공하고 있다. 아침에 부족하면 저녁에 분량을 채운 적이 2~3번 있다. 그 첫 번째 저녁에 적은 날이 작은 아들(초5)이 아버지의 글씨를 제대로 들여다본 날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숙제해라. 독후감 써라. 써라. 또 써라며 글쓰기를 강요하지만, 정작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른의 글쓰기를 본적이 없다는 것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애들은 학부모 동의서에 싸인 할 때나 볼펜 쥔 부모의 모습을 봐왔을 것이다. 조금 더 보태자면 마트나 음식점에서 5만 원 이상 결재하고 패드에 사인하는 정도. 지금처럼 디지털 세상에 아날로그로 볼펜 쥐어가며 노트에 글을 빼곡히 적는 어른이 평범한 풍경은 아닐 터이다.
나름 아이들에게 어른도 숙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66일 글쓰기를 무려 4번이나 참가한 나였지만, 그 마저도 노트북을 켜고 숙제를 적는 모습만 보여줬었다. 그러니 아빠의 볼펜 쥐고 글 쓰는 모습이 낯선 건 어쩜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제)일요일 오전, 아이들이 저마다의 숙제를 위해 책을 펼치고 연필을 쥐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독서대 위에 책을 펼치고 노트에 필사를 위해 볼펜을 쥐었다. 주방에 설거지를 끝낸 아내가 책 한권을 손에 쥐고 오면서 옆 자리에 앉으며 얘기한다.
“그래, 이러려고 소파 없애고 6인용 책상을 거실에 들여놨었지~”
네 식구 거실에서 말없이 각자의 책에 머리를 파묻고 1시간가량을 집중했다. 휴대폰을 내어놓고 책을 선택한 시간이었다.
짧은 끈기로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을 끝내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하다가 멈춘 일을 다시 시작할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선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_강미영《사진으로 글쓰기》(북바이북)
사실, 이 필사가 또 미완의 작품으로 덮인 채 먼지만 쌓일지 모른다. 또한, 이 필사라는 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걸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책 한권 필사한 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더라는 걸 몸소 경험하고 싶었고, 스마트폰 짧은 영상이나 사진에 시간을 빼앗기느니 삐뚤빼뚤 글씨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었다.
한 시간 가량 빼곡히 글을 따라 쓴 아빠에게 작은 아들이 묻는다.
“아버지, 팔이랑 손 안 아파요?
저는 영어 단어 숙제 할 때 엄청 아프던데...”
(아파 죽것다 이놈아! 하지만 또 그렇게 말은 못하고)
“읽고 싶어 읽는 책은 재밌고,
하고 싶어 하는 글쓰기는 안 아프단다.”
그렇게
아빠는
오늘도
사기 쳤다.
이번 필사의 책 제목은
《오십에 읽는 ’사기‘》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