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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이 동하다 Mar 16. 2022

아버지, 오늘은 보드게임 할 수 있어요?

유대인들이 하루 중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저녁이다.

    직장과 집과의 거리는 약 30km다. 왕복 60km의 거리다. 나는 자가용으로 출퇴근한다. 이 곳은 세 번째 직장이다. 그렇게 출퇴근한지가 10년이 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칼퇴근이다. 스마트폰으로 퇴근 QR코드를 찍는다. 출퇴근용 경차에 시동을 켠다. 코로나로 인해 2년 가까이 회식과 모임이 없어졌다. 별다른 야근이 없으면 곧장 집으로 간다. 퇴근길은 교통 혼잡을 피한 새벽 출근길과는 다르다. 집으로 가는길은 언제나 도로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엑셀과 브레이크를 수십 번 밟은 후에야 집에 도착한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른다.‘띠띠띠띠 띠띠띠띠’ ‘찰칵 띠로리’  문을 연다. 그러면 어김없이 특정시간의 라디오광고처럼 아이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다녀오셨습니까?”

    “아버지, 오늘은 보드게임 할 수 있어요?”




슈필라움(Spielraum, 주체적 공간), 독일어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합쳐진 ‘슈필라움’은 우리말로 ‘여유 공간’이라 번역할 수 있다.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실제 ‘놀이하는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뜻한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단어다. 
 _김정운 《바닷가 작업실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21세기북스)



    놀이와 공간을 합친 이 단어는 저자 김정운이 독창적으로 개발한 단어인 듯 보인다. 우리말로 여유공간을 뜻하는데, 아이나 어른이나 그런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긴 마찬가지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퇴근 후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싶다. 워킹맘은 더 할 것이다. 하지만 육아와 함께하는 이 시대 엄마, 아빠라는 직책을 달고 있는 어른들은 그러하지 못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제2막의 커튼이 열리는 것이다.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쉽지 않은 학교생활과 방과 후, 학원 등으로 돌고 돌아 집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잠들기 전까지 산더미처럼 쌓인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 해야만 잠들 수 있다. 그 사이 아빠 엄마에게 칭찬과 꾸지람을 번갈아가면서 듣고는 말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각자의 낮 시간과 같이하는 저녁시간의 온도가 비슷하다. 비슷한 온도라면 그 온도를 끌어 올리는 것은 결국 부모의 몫. 아빠의 지분이 50%이니 이틀 중 하루는 아빠 몫이다. 나만의 슈필라움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의 슈필라움을 위해서 말이다.



    보통인지 특별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집은 TV를 거의 시청하지 않는다. 특히 주중에는 TV를 켜지 않는다. 주말에만 아이들이 유튜브를 TV로 본다. 아이에게 TV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엄마 아빠가 TV를 보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생긴 현상이다. 스마트한 세상에 스마트폰 하나면 TV의 갈증이 해결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와 아내가 TV에 흥미를 느끼지 못함이기도 하다. 인기리에 방영되는 드라마는 물론, 재밌다는 예능조차도 잘 알지 못한다. 물론 그런 궁금증은 가끔 스마트폰 올라오는 썸네일을 통해서 접하기는 한다.



< 집에 있는 다양한 보드게임 >


    그러한 이유로 집에는 다양한 보드게임이 있다. TV는 안보고 저녁시간은 남으니 같이 할 수 있는 문화가 바로 보드게임이다. 아이들이 취학 전부터 틈나면 보드게임을 해줬고, 지금은 일요일에 자기들 둘이서도 할 정도이니 고맙고 감사하다.(제발 그렇게 둘이 하면 좋으련만) 아이들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기들이 해야 할 것들이 하나 둘씩 생겨감에 따라 시간이 조금씩 부족해지고 있다. 우리 집 두 녀석은 학원도 태권도 빼고는 다니지도 않는데 말이다. (꿈이 화가인 작은 아들이 얼마 전부터 미술학원을 다녀서 학원 1개 더 추가이긴 하지만) 다른 또래에 비하면 분명 학습활동과 관련된 학원을 안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늘 부족하다. 이건 이 시대 초등학생들의 숙명인가보다. 그 숙명에 아빠도 동참해야하는가. 그래서 오늘 할 일을 다 하면 아빠가 보드게임을 해준다고 약속했었다. 우리 모두의 슈필라움을 위해서 말이다.




    다시 퇴근 후 도어락을 열었을때로 돌아가 보면,


    “아버지, 오늘은 고쳐 쓰기랑, 방과 후 숙제랑, 일기랑, 책읽기만 하면 끝나요! 오늘 보드게임 할 수 있겠죠?”

    “야! 그면 오늘 한 게 아무것도 없구먼!! 일단, 저녁 먹고 아빠 할 일 다할 때까지 너희 할 일 다 하면 보드게임 한판~”


    아이들과 어른들이 느끼는 시간의 속도는 분명 다르다. 가끔 어느 속도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느긋한 마음이 부럽기는 하다.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양치와 가글까지 끝이 나고서야 보드게임을 펼친다. 큰아이가 원하는 보드게임이랑 작은아이가 원하는 보드게임이 같으면 셋이서 한판한다. 만약 다르면 난 각각 따로 한 번씩 해줘야하는 불상사가 초래한다. 다행히 오늘은 ‘인생역전’이라는 게임을 셋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하루 중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저녁이다. 웃고 떠들며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을 확인하고, 자녀에 대한 밥상머리 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부모가 자녀의 하루 일과를 들으면서 칭찬과 격려를 하다 보면 인성교육이 절로 된다.
 _고재학 《부모라면 유대인처럼》(예담)


    유대인 아빠들은 직장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퇴근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서로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대화를 한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독서를 하고, 그 모습을 따라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독서에 동참한다고 한다. 나 역시 이런 습관을 오래전부터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고, 나름 지키며 생활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내 역시 다른 것은 몰라도 저녁만큼은 아빠와 함께 넷이서 식사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10년 넘게 지키고 있다. 어차피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해야할 시기가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년 넘게(야근, 회식 빼고) 아이와 함께 아빠의 저녁을 지켜주는 아내덕분에 우리만의 밥상머리 교육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는지 모른다. 가끔은 먼저 먹어줘도 괜찮은데 말이다.^^




     내가 집에서 저녁에 반주로 술이라도 먹는 날에는 아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와~ 아버지 술 드셨다. 오늘 무조건 보드게임이다!! 야호~”


     아이들이 커갈수록 직감한다.
     슬프지만 이 보드게임을 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주사위를 굴린다. (무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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