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서던 교단을 떠나면서 나는 가르친다는 행위에 목말라있었다. 나를 초롱초롱 바라봐주던 아이들이 없는 공백을 무엇으로 메꿔야 할지...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때 방승호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장선생, 나눠. 꼭 돈이 아니어도 괜찮아. 장선생이 가진 재능을 나눠."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10년 넘게 국어를 가르쳐 온 능력밖에 없는데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마음에 고민을 가지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그때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문해학교 봉사자 문구가 눈에 띄었다. 2021년 여름, 도서관에 연락을 해서 봉사를 시작했다.
봉사에 앞서 교육이 이어졌다. 10년 넘게 어르신 문해학교 봉사를 해오셨던 선생님이셨다.
'아이들 가르치듯이 하면 되지 않나? 꼭 교육을 받아야 하나'
열심히 진행해주심에도 도서관 교육을 날 선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교육을 마치고, 배정된 어머님과 한글 수업을 시작했다.
어르신 문해학교 학생들의 공식 명칭은 '어머님'이다. 내 첫 어머님 제자는 일대일로 지도를 받는 분이셨다.
형식적으로 교육을 들었었는데 어쩌지? 어르신 수업은 아이들 수업과 천지차이였다. 어제 가르쳐드린걸 오늘도 까먹기 부지기수였고, 칭찬을 해 드려도 믿지 않으셨다.
내가 하는 것이 한글 수업인가?
아님 동기부여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심리 상담인가?
수업을 하면 할수록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을 어머님께는 차마 내색할 수 없었다. 어머님은 가르쳐드린 발음은 까먹으시면서도 아들 자랑, 손주 자랑은 잊지 않으셨다. 어머님을 신경 써서 학교에 가시라고 하는 것만으로도 자제분들이 신경을 쓰는 게 느껴졌다. 어머님은 평생 엄격한 남편 밑에 사느라 큰소리도 제대로 치지 못해서 지금도 소리 내서 책을 읽는 게 어색하다고 한다. 혼자 살고 계시지만 여전히 소리를 내지 못하는 어머님을 보면서 살아온 삶이란 얼마나 여운이 짙은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누군가를 이해하면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지지부진한 어머님 배움 속도가 이해가 되자 어머님의 특별 보충 수업이 좀 가벼워졌다. 그전까지는 매주 1회 1시간 30분 수업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머님을 진심으로 이해하고부터는 나 역시 그 수업을 즐길 수 있었다. 보충 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고 나서 첫 어머님과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정규 수업으로 복귀를 한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내 수업이 어머님께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기뻤다. 도서관 선생님의 주선으로 난 새로운 어머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2 021년 12월 나는 새로운 어머님들과 만남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