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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ileall Jul 15. 2020

올해는 현실주의자인가

  그대들이 이상적인 것을 보는 곳에서 나는 인간적인 것을 본다. ——아아,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_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20대의 나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오가며 바빴다. 내 사고가 바빴다. 많은 사상가들의 책을 읽으며 이상과 현실을 오가느라 바빴지만, 그 이유는 확연하다.


  Polya는 “수학교육의 첫 번째 과제는 젊은이들에게 사고하게 하는 것”(p. 17)이라 하였다(김원경 외, 2012에서 재인용). 수학교육의 목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수학적으로 사고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현재 수학교육의 현실과 방향에서 수학교육의 의미는 정형화된 수학 지식의 결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수학 하는 사고 과정을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20대의 나는 수학을 공부하며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고하는 학생이었다. 고전 문학 사상가이든 고대 수학자이든 그들의 사상, 생각, 사고를 닮아가는 과정이 내 판단 체계를 다져 주었다.


   당시 나에게는 까닭이 중요했다. 지금도 중요하지만. 까닭을 알기 위해 물음표는 항상 나와 함께 했다.  까닭이 내가 이르고자 하는 곳에 다다르게 했기 때문이다. , 기호,  등으로 (변화하며) 이루어지는 언어를  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성격에는 적격이었다. 서서히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 점점 절정의 순간을 취해 계속 유지하는  성격은 수학의 성질들(theorem, corollary)  어울렸다. 평균    만에 이루어진 수학 이론은 고전의 매력에 빠져 있던 나를 끌어당겼다. 고전마다,  작가들마다 솔직하게 표현하고 확실하게 주장하는 ‘자신감 나를 끌어당겼듯이 수학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자신감' 나를 이끈 매력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학의 확실성》이라는 책에서 혼돈이 오기도 했지만 그때 나에게 수학 이론은 절대 진리로 너무나 확실했다.

  수학을 이상과 현실의 복합체로 생각했던 나는 어느 한 가지만 취할 수가 없었다. 둘 다 가져야 했다. 어떤 친구는 나를 공상가라며 꿈꾸는 이상주의자라 추앙하였고 어떤 선배는 나를 계산적인 현실주의자라고 외쳤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어느 쪽에 치우쳐야만 옳은가. 그래야만 올바른 사람인가.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단순하고 간단한, 쉽고 편리한 것은 취할 수 있어도 복잡하고 어려운, 내가 얻고자 하는 깊은 부분은 취할 수 없잖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 다 가지기로 결정했다. 둘의 장점을 취하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어느 해는 현실에 좀 더 치우쳤고 어느 해는 이상에 좀 더 치우쳤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매해 매달 매일 마다 현실과 이상을 고루 취하는 생활이었다. 이제는 이성과 감성이 함께 존재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나 뿐 아니라 가족들과 지인들도 인정할 정도로.

  

  작년까지는 고루 느끼며 고루 발휘하며 평안하고 즐겁게 살았다.


  올해는 어떠한가. 내가 좋아하는 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고 싶은 것이 작년 하반기부터 목표였고, 운동으로 근력을 키우는 것이 올해 상반기 목표였다. 그 둘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둘 다 초보기에. 거기에 더하여 올해 중반기에는 글쓰기도 추가되었다. 하나 더 더하여 이 세 개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나 자신을 지키면서 실력가가 되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한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집중해야 한다.


흐흣.

생각지도 않고 이리 저지르고 있는 나,

나는 아마도, 올해는 좀 더 현실주의자로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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