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6번째 변론, 무지의 자각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펼쳤다.
그동안 이 책에 관련하여 정리할 때 ‘변명’ 대신에 주장이나 변론이라는 단어로 적었다.
오늘은 소크라테스가 여섯 번째 변론을 어떻게 주장했는지 다시 읽었다.
소크라테스는 신탁으로 악명을 얻었다. 그 신탁은 이러한 내용이다.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에우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만인 가운데서 가장 현명하다.”
여섯 번째 변론 주제는 ‘현명하다’ 임을 우리는 (첫 구절에서부터) 추측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소크라테스 책을 읽은 경험이 있다면, 다음 전개는 당연하게 펼쳐진다.
알겠지만, 추측 가능하겠지만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정말 현대적인 문답형이다. 이번에도 자문하며 시작한다.
후훗, 법정에서 이리도 담담할 수 있다는 건, 이리도 담담히 말할 수 있다는 건 이런 모습은 평소에 배어 있는 자신의 모습, 그의 모습이로다!
신탁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진다.
무작위 배심원들의 반응까지 상상하며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으면 더 재밌다. 그보다 더 재미난 건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번 변론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내세워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을 찾으려는 반증을 이끈다. 그리하여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즉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일 수 있다는 전제하에 그 정치가와 대화를 나눈다. 아쉽게도 그 대화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알게 된다.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관찰하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명하지 않다는 걸, 다시 말해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던 그 사람이 사실 현명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소크라테스는 그 사람에게 그런 사항을 설명해 주려다가 오히려 미움을 샀다.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는 이 정치가보다 더 현명하다고 알려진 사람을 또 찾아갔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그 사람들도, 자신도, 아름다움도, 선도” 잘 모르고 있지만 자신이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신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소크라테스가 타인의 무지를 자각해 주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소양이 없는 이들은 소크라테스를 적으로 삼았다.
누구든 자신이 무지하다는 걸 느끼면 당혹스럽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의 권력가들도 그러했으리라.
평범한 사람도 “너 무식하잖아, 넌 모르잖아, 넌 그것도 알지 못하니”와 같은 말을 들으면 자신을 둘러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제대로 관찰해서 명확하게 말해 준 사람을 되려 비방하거나 미워한다.
분명, 나도 그러한 적이 있었겠지. 특히 나보다 어린 사람이 나를 자각시켰을 때는…흐음 더욱 그러했겠지. 시간이 흐르고 보니 (관심 있는, 애정 담은) 감사한 행동이었는데 말이다. 자신을 인정하기란, 참…어느 순간이든 쉽사리 되지 않는다. 갑작스러울 때는 몸이 반응한다. 발개진다. 특히 자신도 모르고 있던 부분을 타인의 시각으로 알게 되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더욱더 당황스럽다.
소크라테스는 그다음 변론에서는 개에게 맹세한다. 음, 개에게? 왜 그러했는지, 어떤 의미일지 다음 편을 기대한다.
(202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