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자의 글
어찌 이리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셨을까.
무척 반갑다. 무척 반가운 글을 만났다.
언제나 나에 대한 평은 ‘차분하다.’였다.
지금도 항상 차분하다는 말을 듣는다.
단편이 모여 복합체가 되고, 단면을 오랜 시간 관찰하여 전체를 파악했다. 전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파악될 때까지 끝없이 조망하며 살았다.
그러려면, 세상의 작은 요동이든 큰 사건이든 뭐든 차분해진다. 절로 고요해진다.
이제 그(현병호, 2019)의 단상을 정리해 본다. 참으로 감동스러운 글이다. 감동적인 표현의 연속이다.
천리 길은 단순히 한 걸음이 모여서가 아니라 걸음과 걸음을 이어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 한 걸음이란 것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것은 그가 스물세 살 때 산길을 걷다가 천리 길이 한 걸음’부터’가 아니라 한 걸음 ‘속에’ 있음을 눈치챈 후로 수십 년이 흐른 뒤다.
크하, 참 멋지다. ‘속에’ 있었다고 한다. 나의 낙서장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내면과 속이다. 속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고 싶은데 왠지 내면이란 단어로 종종 대치했었다. 이 필자 덕분에 용기를 낸다. 앞으로는 그냥 이 감동적인 단어인 ‘속’을 쓰리라.
천리 길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걸음들이 이어진, 거대한 하나의 걸음이었다.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내 생각을 뒤흔드는 절묘한 문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건의 관점에서 전체는 부분의 총합이 아니며 전체 속에는 부분에 없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 무언가가 숨어 있단다. 이미 알고 있던 사항이건만, 후훗, 그동안 그가 표현한 것처럼 설명하거나 전달하지 못하였음에 안타깝다. 내가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이기에 타인도 당연히 알 것이라 여겨 알맹이를 빼버리고 설명하고 있었구나.
원자론에 근거한 기계론적인 접근은 본질을 놓친다. 걸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 변환이 일어난다,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뀌면서. 걸음 사이에는 역학(관성의 법칙, 중력가속도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작용하고 동작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한다.
부분에 없는 것이 전체 속에 있고 맥락을 놓치면 전체를 놓치는 것이니 사물이 아닌 사건의 관점으로 볼 때 보이지 않는 ‘사이’를 볼 수 있는 거구나.
사건은 긴밀하게 맞물려 있어 어느 한 부분을 잘라내어도 그 속에는 전체 정보가 다 들어 있으므로 대표성이 작동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반면 시작이 전부라고도 말한다, 제대로 시작해야 마지막까지 그 에너지가 이어지기 마련이므로.
칼 포퍼는 과학의 방법으로 귀납적 방법이 안이하다고 보고 가설을 세워 거기서부터 연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장한다는 것은 이미 갖추어진 전체성이 온전히 피어나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한 번에 이해되고 크게 공감했다. 뭔가를 배우는 방법도 연역식이라고 하며 언어 습득을 예로 든다.
언어를 습득할 때 아기는 언어의 규칙부터 터득하고 나서 그 원리에 따라 복잡한 표현도 점점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단어 몇십 개로 언어를 잘 구사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몇 천 단어를 알고도 말 한마디 못하는 어른이 있지 않은가. 그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작은 규모의 온전함을 먼저 구현한 다음 그것을 확산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불완전한 것들은 아무리 많이 모인다 해도 완전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도 된다.
그가 쓴 문장 중 최고다.
“물이 100도에서 수증기로 바뀔 때까지 물밑에서 진행되는 변화는 아는 사람 눈에만 보인다. 한 걸음 속에 천리 길이 이미 들어 있음을 아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안다.”
20대 초에 수영을 배우다가 일주일 만에 그만둔 적이 있다. 물속에서 몸의 힘을 빼지 못해서였다. 나름 힘을 뺀다고 뺀 거였지만 내 몸은 물에 뜨지 않았다. 진작 알았더라면, 진작 이 글을 읽었더라면.....,
관절은 근육과 연동되므로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관절의 유연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힘을 뺄 수가 없다고 한다. 가장 에너지가 적게 드는 움직임이 중력가속도에 동조된 움직임이다. 몸 자체의 힘과 중력 덕분에 갖게 되는 힘이 조화를 이루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때 비상한 힘을 발휘한다. 그 우주의 힘이 방해받지 않고 우리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힘을 빼야 하는 것이다.
어떤 분야든 최고의 경지에 이르려면 ‘릴랙스’가 필요하다. 무척 공감한다.
또다시 최고다.
“우주의 힘이 내 몸을 통과한다는 것은 에너지의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다. 힘 빼고 공을 던질 줄 안다고 해서 힘 빼고 사는 법을 깨우친다는 보장은 없지만, 원리가 통한다는 것을 알면 삶의 비밀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애장도서를 펼친다. 그와 유사한 삶의 비밀이다.
‘비밀’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게 해 준다. 현자들은 늘 이 법칙을 알았다. 당장이라도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을 살펴보라. 그들도 이 법칙을 알았다. 물론 몇 명 안 되는 사람뿐이었지만. _밥 프록터
지금 동작이 다음 동작을 결정하는 동시에, 다음 동작이 또한 지금 동작을 결정한다.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고 하며 얼핏 하나의 동작처럼 보이는 것을 몇 등분으로 세분하는가에 따라 “고수와 하수”가 나뉜다고 한다. 핵심은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다.
다음 문장으로 설명을 부가한다.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는 순간, 타자가 공에 집중하여 호흡을 멈추면 공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공이 실제보다 훨씬 크게 보여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만 눈에 들어오면 야구공이 축구공만 하게 보인다. 그리하여 천천히 날아오는 커다란 공을 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야구 선수들은 대부분 *동체 시력이 좋아지도록 연습한다. 가령 투수가 어떤 수(변화구)를 던져도 타자는 그 공을 거를 수 있도록 훈련한다. 그때 필요한 것이 동체 시력이다. 즉, 야구공에 숫자나 글자를 적어서 투수가 던졌을 때 타자는 그 문자가 무엇인지 맞출 수 있도록 연습한다. 기본 후에 다져야 할 사항이고, 그 후에 다음 단계를 더 밟아 고수가 될 수 있다.
모든 순간 속에는 모든 시간이 담겨 있다. 과거도 미래도 사건의 세계에 펼쳐져 있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이 부분은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 현재는 미래를 포함한 현재인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산다는 의미일까? 미래를 바라보는 수(한자)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는 사건의 세계에서는 내일이 오늘을 결정하고 어제의 의미가 오늘 정해진다고 말한다. 시민성은 그 공동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개인의 대표성을 나타내므로, 대표성을 갖는다는 말은 주체성을 갖는다는 말이기도 하다고 설득한다.
이럴 수가. 그저 전체로만 보아선 안된다고 하고선, 겉만 보아선 안된다고 하고선, 복잡한 사람의 마음과 의지로 나타나는 시민성을 쉽사리 변절하는 개인의 대표성에 빗대다니 어렵구나.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충분치 않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결론을 말하는구나.
“긴밀하게 연결되고 싶어 하는 그 에너지가 제 방향으로 향하게 도와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 어른의 역할이다."
이럴 수가, 내 몫을 다하고 싶은 열망을 일깨운다.
‘깨어있는 자의 글을 읽는 묘미로구나!’
(202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