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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효 Feb 12. 2022

얼굴을 맞대는 게 두려워

비대면으로 살아보기 전까진 그랬지. 그랬다.

비대면으로 살아보기 전까진 그랬지. 그랬다


평생을 프리랜스로 살아왔지만 나는 별문제 없이

비교적 무난하게 사회생활해온 편이다. 

적당히 무심하고 적당히 개인주의적이면서 적당히 사교적이고

무엇보다 환경의 변화에 적응력이 좋은 편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딱히 ‘문제 일으킨 만한 용기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방송국 막내작가를 시작했다.

지금은 많이 알려졌다시피, 막내작가 일은 참으로 고되다.

페이는 적고, 일은 많고, 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제작 일정 때문에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방송 프로그램 일정에 생활리듬을 맞춰야 하는 것이

사회 초년생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제작 스태프들 이를 테면 연출, 촬영, 세트, 소품, CG, 음악, 더빙 등

제작 단계별 일정을 맞춰야 하고,

거기에 출연자들의 스케줄과 그에 관련된 의상, 메이크업까지

정말 많은 인원이 하나의 프로그램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위클리 프로그램의 경우, 프로그램 제작기간은 일주일이지만

아이템을 선정하고 구성해서 촬영, 녹화를 하고 후반 작업에 필요한 자막까지,

작가들은 그 단계별로 쪼개진 마감에 맞춰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작은 변수라도 하나 끼어들게 되면 모든 일정이 꼬여버리고,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일상도 꼬여버린다.  

그래서 기본 일정은 정해져 있지만, 유동성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

그 혼란스러움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정은 오롯이 프로그램의 일정에 종속되어야 한다.      

출근 시간은 예정대로이지만 퇴근 시간은 제멋대로이며

퇴근 후에도 갑자기 노트북을 켜거나 긴급 통화를 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즉흥적인 스케줄을 용납 못하거나, 엉클어진 계획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은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방송작가로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게 말하면 순발력이 좋고, 솔직히 말하면 무계획을 계획으로 살아온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 생긴 돌발상황이나 섭외된 사람의 갑작스러운 출연 번복을 늘 염두에 두고

플랜 B, 플랜 C를 만들어 놓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내 성격에도 잘 맞았다.      


나는 누가 시키지 않은 일에도, 이를 테면 

극장에 가도 만약에 생길 수 있는 불상사 – 강도가 목숨을 위협한다든가, 화재나 지진이 생겼을 때 탈출하기 쉬운 자리로 예약을 하고 탈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서야 안심하고 영화에 집중할 수 있을 만큼 

여러 치명적인 경우의 수를 ‘굳이’, ‘자발적으로’ 고려하고 나름의 대책을 강구해두는 성격이다. 

치밀해서라기보다 잡생각이 많은 편이고, 예전엔 그런 성향이 더 심했다.


어쨌는 무용한 잡생각이 많은 게 방송일을 할 땐 크게 도움이 되었고,

잡생각의 유용함을 발견하면서 이상한 자신감으로 발전했다고나 할까.

잡념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대비책’이라는 꽤 괜찮은 단어로 포장할 수 있다는 것에

일종의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구체적 잡념의 체계화’가 막내작가 시절, 내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성취감 중 꽤 큰 비중을 차지했다.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일정은 늘 빡빡했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뜻을 맞춰서 해내는 일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불만은커녕 내가 기꺼이 감당할 만한 난이도였고 언제나 적절한 성취감과 보람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30대 중반에 진학한 대학원 공부와 9년 째 해온 강의도 마찬가지였다.

학창 시절 맛보지 못한 공부의 즐거움도 알게 되고, 각기 다른 이유로 학업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새로운 만남도 무난한 수준에서 즐겼다.


강의를 하거나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히 시작하게 된 강의는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정말 열심히 강의 준비를 했고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과 교감하는 것 

느끼는 보람도 컸다.  


강의하라고 불러주는 곳이면 서울,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까지도 갔다.

1년가량은 서울에 거주하면서 두 시간짜리 아침 데일리 생방송을 인천에서 마치고

경기도 안성과 경주를 오가며 강의를 하기도 했다. 힘든 줄도 몰랐다.

오히려 주위에서 걱정을 많이 해주었다. 일하면서 지방까지 운전하면서 강의를 다니는 것이 힘들지 않냐고. 몸이 피곤하기는 했지만, 피로감 때문에 일도, 강의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즐거웠으니까.



나는 현실적이고, 모든 변화에 적응도 잘하고, 활동적이고, 

웬만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의미를 찾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비대면이 되기 전 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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