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 사람이 떠난다
/일분은 한시간이 되고, 한시간은 하루가 된다. 시간이 세월이 될 때, 일상은 인생이 된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고, 나의 사람들이 사라진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되면, 자연스레, 떠난 사람보다는 남은 사람의 수를 센다. 그제서야 우리는, 나이가 들었다고 한다. 얼마나 더 나이를 먹어야 슬프지 않을수 있나. 흰머리 솎아내듯 뚝뚝 잘라낼수 없어, 나는 오늘도 그들을 나이에 묻는다.../
미네소타의 겨울이 한참 호기를 부리던 11월 중순. 종아리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택시에 올랐다. 말많은 기사 아저씨 덕분에 쉽게 잠을 깨며 도착한 공항은 눈이 시릴만큼 밝은 빛으로 활짝 열려있다. 9년 10개월 만의 방문. 뭐가 그리 바빴을까. 미리 받아놓았던 여권은 빳빳한 모습 그대로, 어정쩡한 표정의 십오불짜리 월마트 증명 사진 하나가 달랑 붙어있다. 며칠만에 급하게 결정한 여행이다. 정말 오랜만에,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놓칠까봐 꼬박 새고 온 밤이 무겁게 눈꺼풀을 누른다.
황해도 연백 출신인 할머니는 늘 당당하고, 세고, 건강하셨다. 일제, 징용, 전쟁, 피난, 분단, 사별.. 대한민국 역사상, 아마 한국인으로는 가장 힘들었을 시기를 다 겪고도 꼿꼿하셨다. 늦둥이 외아들의 갑작스런 죽음도 혼자 삭혔고, 체념인듯 통달인듯 긴 한숨 몇번만에 지나간 고생 보따리들을 부질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셨다. 딸부잣집 장녀로 함께 피난온 동생들을 가르치고, 결혼시키고 하는 모든 일들이 할머니의 인생이었다. 마치 다른 형태의 집성촌처럼, 나의 황해도 외가 식구들은 그렇게 한 마을에 모여 살았고, 그 중심은 늘 큰 할머니- 나의 외할머니셨다. 평생 마당을 고집하셨다. 잔디, 채소는 물론이고, 대추나무, 포도나무까지 가꾸던 우리집은 늘 친척들로 복작스러웠다. 서른이 넘어서야 오빠와 내가 각자 가정을 꾸려 나가고, 할머니와 엄마, 아빠만 남아 평균나이 80을 사뿐히 넘기는 고령화 가족이 되었다. 어쩔수 없이 ‘교통 좋은’ 아파트로 옮기셨고, 14층이라는 높이와 똑같이 생긴 네모 건물들은 할머니께 쉽지않은 도전이 되었다.
스스로 바깥 출입을 삼가시던 어느날, ‘다행히도’ 집안에서 쓰러지셨고, 바로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할머니의 93번째 생신은 병원에서 보내신다고 했다. 느낌이 좋지않다. 굳이 말로 하지않아도 들렸다. 이런게 촉일까? 텔레파시? 할머니가 얼마나 안 좋은지 엄마는 회피하고 있었다. 딸이니까? 멀리 사니까? 애가 셋이니까? 출가외인이라는 촌스런 말은 하지않았어도 신경쓰지 말라는 그 말이 명치 끝에 걸렸다.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바로 표를 샀다. 10년만의 방문 -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부모님의 아파트... 참 무심했구나. 꼬박꼬박 애들에게 보내주던 엄마의 편지에서 주소를 찾았다. 짜잔하고 나타나 할머니를 놀래켜 드려야지... 인터넷으로 공항에서 아파트까지 가는 버스를 알아냈다. 세상이 좋아져 다행이다. 그리고 이 좋아진 세상에 살고 있어 다행이다. 새벽 4-5시 비행기쯤이야 하나도 힘들지 않다.
병원은 바로 집에서 마을버스로 몇 정거장 떨어지지않은 가까운 곳이었다. 언덕길만 아니었으면 운동삼아 걸어서도 갈수 있을듯 했다. 유행처럼 곳곳에 퍼졌다는 찜질방 건물이 보인다. 역시나 부동산, 야릇한 그림이 붙은 찻집 (아마도 불륜 찻집??), 직접 재배한 야채만 쓴다는 식당... 버스 종점을 지나 한적한 언덕길 맨 끝. 거기에 병원이 있었다. 깨끗한 4-5층 벽돌 건물이 마음에 든다. 아침인 탓일까. 빈 구급차 한대가 서 있을뿐 다른 차들은 보이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가 왼쪽 두번째 방. 열린 문으로 아침을 맞은 어르신들의 모습이 보인다. 축축한 냄새, 떡 진 흰 머리.. 바들바들 떨리는 뼈만 남은 팔다리... 여섯..혹은 일곱명 쯤? 누구도 똑바로 볼수가 없었다. 어느 침대에 계실까? 이 방이 아닌가? 입구에 이름이 써 있었는데, 내 할머니가 안보인다..??
최악의 시대에 태어나 고된 삶을 호령하시던 내 할머니가 이제 노환으로 누워계신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행복해 졌음에도, 더이상 지킬것도 이룰것도 없이 그저 누리기만 하면 되는 지금을, 그만보고 가시겠다 한다. 그 당당하던 체구는 사라져 가느다란 뼈만 드러내고, 두피가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다 빠져버린 머리카락, 코에 꽂은 호스로 호흡과 습식을 해결하는 완연한 환자의 모습으로 저쪽 구석에 누워 계셨다.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반기는 눈빛만이 예전과 같을 뿐. 전보다 무척 작아진 손을 잡았다. 가죽신발처럼 험한 굳은 살과 허옇게 갈라진 손톱... 후회스럽게도 이렇게 할머니 손을 잡았던 기억이 없다. 늘 어깨를 두드려 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손을 이렇게 꼬옥 잡아드린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롱코트까지 손수 떠 주셨던 그 손이 이젠 내 손을 잡기있기도 힘들어 마구마구 떨린다.
남편 혼자 애들 셋을 어떻게 보냐고 걱정하신다. 막내가 엄마 찾을까 전화해 보라신다. 이렇게 멀쩡한 정신이면 본인 몸이 죽어가고 있음도 아시리라. 옆 침대 치매 할머니처럼 차라리 호랑이라도 잡는다면 덜 힘들텐데. 십년만에 한국 나와 매일 얼굴 보여주려는 손녀에게 시차 힘드니 하루이틀 푹 쉬라신다. 할머니야말로 걱정말고 이제그만 편히 쉬시라고 하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고생많으셨다고 하고 싶었다. 눈물이 쏟아지기 전에 일어서느라 한번도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시리라 믿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왜 못했는지, 할머니는 다 아실거다.
할머니의 빈 방. 표 끊고 이틀만에 완성한 작은 담요를 꺼내 놓았다. 할머니가 들어주신 롱코트에 대한 많이 늦은 보답이었다. 예쁜 사람들이 나오는 드라마처럼, 활짝 펴 무릎에 덮고 휠체어를 밀어 산책 나가면, 햇빛 아래 기분좋게 새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깨끗이 빗어넘긴 머리카락 아래로 새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기대 앉으면, 호호 불어 환자용 죽을 떠 먹일거라 생각했었다. 어쩔수 없이 현실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 할머니 옆에 앉아 손에 로션이나 발라드리는 게 전부였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던 15일간의 병문안을 마쳤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눈빛으로, 호흡으로, 따뜻한 체온으로 전해졌으리라 변명하며 미국으로 돌아왔다.
두 달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마흔 둘이 되던 그 해, 또 한 사람이 사라졌다. 얼마나 더 나이를 먹어야 슬프지 않을 수 있나. 나는 오늘도 그들을 내 나이 속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