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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운 Oct 26. 2020

개 똥

일흔 넘은 아버지에게 개똥을 맡긴다

“하바지, 멍멍이 응아.”

서툰 발음의 아이가 할아버지 손을 잡아 끈다. 70 중반의 아버지가 느릿느릿 소파에서 엉덩이를 뗀다. 밖에 나가는 걸 눈치 챈 강아지 샤이가 어느새 발밑에 달려와 목줄을 기다린다. 

“하버지, 샤이 응아? 미 투! 미 투!”

신이 난 세 살 막내가 벌써 현관 앞에가 신발을 신는다. 아직 오른쪽 왼쪽을 모르는 나이. 그래도 확률이 50 : 50 인데 꼭 반대로 신는 건 왜 일까. 어차피 한 치수 큰 신발이라 바꿔 신어도 들어가긴 한다. 조그만 손에 파란 비닐 봉지를 하나 꼭 말아 쥐었다. 아버지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벌써 이십년 다되어 가는 외국 생활. 아이들 때문에, 직장 때문에, 점점 다시 돌아가기 힘들어진 한국이다. 비행기를 싫어하시는 아버지는 그래도 딸과 손녀들을 보기 위해 그 먼 거리를 오셨다. 다른게 있다면, 아마 올해가 마지막 방문일거라는 것. 몇 년 째 파킨슨 병을 앓고 계신 아버지의 손발이 예전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2년 전에 시작된 초기 치매로, 장소나 방향, 시간, 날짜, 가끔은 아이들의 이름도 잊으신다. 하루에 먹는 약만 한 주먹은 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밤이되면 상태가 안 좋아진다. 불안감에 잠을 못자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잠결에 노래를 부르거나 누구와 대화를 하신다. 처음에는 잠꼬대라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멀쩡하게 행동하시기에, 그냥 치매 증상 중 하나라고 보기로 했다. 밤새 '활발히' 활동하신 아버지는, 새벽녁 해뜰무렵에 잠이 들어 하루 종일 꾸벅 꾸벅 졸고 계셨다. 몸이 예전같지 않으니 마당일도, 백화점 산책도 힘들다. 그저 아침 저녁으로 그래도 제일 덜 뜨거울 때, 동네나 한 바퀴 도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나마 주춤주춤, 힘들게 걷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셔서 엄마가 늘 잔소리를 쏟아 부어야 한번쯤 나간다. 왕년에 유명 기성복 양복 모델도 하셨던 자기애 때문이었을 거다. 요즘으로 치면 아마 인터넷 쇼핑몰 피팅 모델 쯤…? 그래도 아버지는 한국말이 서툰 우리 아이들과 산책나가는 걸 좋아하셨다. 아이들끼리 떠드는 모습에 감탄하기도 하고, 늦둥이 막내의 한국어 영어 잘 섞어 놓은 짬뽕말에도 늘 언어능력이 좋아서 그렇다며 칭찬하셨다. 거기에, 친구가 여행가면서 몇 주 맡겨놓은 얌전하 강아지 한마리가 더해졌다. 5살먹은 시츄였는데, 어느새 아버지를 제일 좋아하고 따랐다. 자기 예뻐하는 사람은 안다고 했던가. 예전부터 개를 좋아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늘 개 몇마리와 함께 살았었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이 녀석도 아버지를 잘 따랐다. 아마, 아버지가 손이 떨려 자꾸 음식물을 흘려서 그런것 같기도 했다. 사료 말고 이렇게 맛있는 걸 흘려주는 사람은 아버지와 세살 막둥이 뿐이니까. 


어쨌든 샤이는 아버지와 금새 친해졌고, 아이들이 아닌 아버지가 데리고 나가야지만 응아를 했다. 하루종일 시간도 모르고 티비만 보며, 졸고 깨고를 반복하시던 지루한 여름에, 샤이의 '응아'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하는 중요한 일과가 생겼다. 신기하게도, 늦게 잠이 든 아침에도 꼭 7시면 눈을 뜨셔서 강아지를 데리고 나갔다 들어오셨다. 본인이 식후약을 먹었는지도 기억 못하시는 분이, 강아지 사료는 꼬박꼬박 챙겨주셨다. 다시 누웠다 일어나는 점심 무렵, 또 강아지 산책 후 점심을 드시고, 오후에 한번, 저녁에 또 한번. 누가 얘기한 것도 아닌데 딱딱  시간을 맞춰주셨다. 힘 없는 손으로 목줄을 쥐고, 남들의 반도 안되는 보폭과 속도로 산책을 하신다. 뻣뻣해진 허리를 구부려 강아지 응아를 치우고, 조그만 파란 봉지를 꽁꽁 묶어 버리시는 모습을 나와 엄마는 유리창으로 바라만 보았다. 


“네 아빠가 평소보다 10배는 운동하는 거야.”


그랬다. 바나나 껍질도 까기 힘들어 꼭지를 잡고 바르르 떠는 손가락을 나는 보았다. 레스토랑 포크가 무거워 중간중간 내려놓던 모습을 본 이후부터는 그냥 집에서 식사하시도록 했다. 막둥이 아토피 로션 좀 발라달라고 했더니 펌프조차 누르지 못하시던 두 손... 계단 가운데에서 잠시 쉬었다 움직이는 마른 다리... 아버지가 계시던 두 달 동안 난 아주 나쁜 딸이었다. 아이 로션도 바르게하고, 과자 봉지도 열게 하고, 아빠 빨래를 직접 세탁기에 넣으라고 시켰다. 정수기 물 따르는 것도, 냉장고 문을 여는 것도 도와주지 않았다. 뭘 쏟아도 키친 타올만 갖다주고 뒤돌아섰다. 식탁 의자를 넣고 뺄때도 모른 척 했다. 개 산책과 똥 치우는 것도 아버지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손발을 움직이게 하고싶었다. 더 좋아지지 않는 병인 걸 알고있기에, 더 나빠지지 않도록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 시절 참 드물게도 미술을 전공하셨다. 손이 떨려 일을 접으신 이후에도 집안 곳곳에 아버지가 만들고, 그리고, 고쳐온 흔적들이 남아있다. 온통 손으로 하시던 일들을, 내색하지않아도 본인의 손이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그래서 생각했던게, 올 여름에 오셨을때, 아이들과 함께 그림이라도 그리며 시간을 보내셨으면 했다. 그러나 이게 무슨....! 막상 미국에 도착한 아버지의 상태를 직접 보고나니, 잔뜩 사놓았던 미술 도구를 꺼낼수가 없었다. 그것만은 정말 아버지의 자존심이실거다. 화려한 수상 경력도, 비싸게 팔리던 작품도,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쌓아올린 명성도... 일일히 기억하지 못 할 만큼 무수했던 영광들이 사라졌다. 생각대로 안 움직여주는 두 손을 바라본다. 젓가락 두짝도 자꾸만 엇나가게 하는 그런 손가락에 꽉 채워진 주름... 아이들에게 주는 작은 낙서라도 - 비록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감탄 하겠지만, 아버지에게는 큰 상처 일 것 같았다.

   

아침 비행기로 두분은 한국으로 가셨다. 배웅하고 오는 길에 문득 옛날 그림들이 생각났다. 오실때마다 짬짬히 그려주셨던 것들이 차고에 쌓아둔 박스 어딘가에 남아있을거다. 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들이다. 아마 잘 찾아보면, 애들 어렸을적 얼굴을 그려주신 것도 아직 있을지 모른다. 2주 후면 출근이다. 며칠 남지않은 여름 방학동안, 박스를 정리해야겠다. 운이 좋으면, 내 결혼 때 직접 깎아서 만들어주신 목각 오리 한쌍을 찾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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