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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운 Oct 26. 2020

그 아이

어린 내 친구! 우리 같이 행복하자

“안녕! 안녕, 친구! 우리집에 놀러와요!”

그 아이가 온다. 저 멀리서 힘차게 두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D 가 내게 다가온다. 7월의 뜨거운 오후, 여름 캠프가 한창이던 학교 운동장에는 휴식시간을 즐기러 몰려나온 아이들이 한 가득이다. 벤, 크리스챤, 드바니 처럼 제일 어린아이들이 4살, 제일 윗학년 아이들이 이제 막 12살이 되는, 나이 차이가 큰 그룹으로, 대충 봐도 한 150명은 될 아이들이 놀고 있다. 매일 매일 교사진 이삼십명이 지키고 섰지만, 안전상 아무래도 거칠은 아이들은 제제를 좀 해야 할 때도 있다. 선생님들은 의례히 D를 주시한다. 


D는 아홉살 막 지났다. 하지만, 또래보다 한 뼘 정도는 큰 키에, 또 한번 클 때가 되었는지, 아니면 체형이 그런건지, 상체가 제법 듬직하다. 매일 배고프다고 툴툴거리면서도 멍키바나 스파이더 웹 같은걸 오르내릴때 보면, 도데체 저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부모님 두분 다 한국사람인 D는 남들만큼의 재능이나 체형을 갖지는 못했지만, 아주 액티브하고 밝은 아이다. 특별히 다른 운동은 하지않아 몸은 차라리 둔한 편이라 하는게 맞겠다. 한국사범님이 신 곳에서 태권도를 시작했었지만, 주의가 산만해 수업이 안되니 더이상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만 듣고 그만두었다. 미국 사람들이 가르치는 다른 운동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다. D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민와서 노동일을 하시는 D의 부모님은 두분 다 영어를 못하신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일주일에 한 번, 한국 교회 나가는 거 외에는 아이와 가족들은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학기 중에도 하루 종일 장애반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야하고, 교실에는 그저 15분씩 잠시 왔다갔다 할 수 있을 뿐 이었다. ‘적응훈련’ 이라고 했다. 보통반에 적응할 수 있는 훈련. 보통 아이들과 싸움없이 놀 수 있을때까지 반복해서 교실은 방문만 하는 그런 훈련이다. 그래서인지 D는 학교를 좋아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집에 있어도 아무 할게 없었던 아이는, 유일한 취미인 만화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약간의 지적장애를 가지고있는 아이 치고는 꽤 높은 읽기 레벨이 나오지만, 읽는 시간이 채 5분을 넘기지 못한다. 다른 수업을 따라 갈수 없어 종일 혼자 걸어다니거나, 빈 교실에서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 D에게 여름 학기는 단비였을거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기에 새로운 아이들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첫날 첫 수업 - 오전 9시에 시작하는 아침반에서부터, D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된 선생님은 특수 교육팀을 불렀다. 교실에 들어간지 채 십분도 안된일이었다. 마침 다른 업무 중이던 내가 짬을 내어 달려갔다. D 박... 한국 아이.


한국에서는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십년 넘게 일한 경력자이지만, 미국 학교에서는 모든게 달라 아직도 많은게 조심스럽다. 게다가 정상적인 아이들도 아니고 특수교육 아이들은 솔직히 많이 접해보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나는 명문 사립학교와 미국 유학반을 맡던 '고급' 강사였다...) 지난 1년간 내가 미국의 공립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던 아이들은 흔히 말해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고, 그중 서너명은 특수교육이거나, 외국 아이들이다. 처음 D 를 맡아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사실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전공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하나씩 장애 아이를 보다보면 경력도 될거고, 다음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쪽으로 일을 해 볼 수 있겠다 싶었다. 이런 사심을 알리없는 D는 처음에는 나를 따라 교실 밖으로 나오는 것 부터 강하게 거부했다. 새 친구들과 놀고 싶었을거다. 교사와 1:1로 매일매일을 보내야하는 이 아이에게 교실이라는 건, 또래 침구들과 어울리는 유일한 휴식처였을거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시무룩하게 나를 따라 나선 아이가 입을 연다.

 

“나는 특수교육 선생님들이 싫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해요.”

“뭘 하고 싶은데?”

“게임도 하고싶고, 놀이터 가고싶고…나는 농구를 좋아해요.”

“아직은 쉬는 시간이 아니니까 우리 보드 게임할까?”

“그네 타러 가면 안돼요?”

“그건 있다가 친구들하고 같이 나가자. 다같이 놀면 더 재미있잖아." 


사실, 장애아들은 운동장 지킴이가 없는 시간에는 나가 놀수가 없다. 그런 규정을 알리 없는 아이가 그제서야 웃는다. 누구보다도, 친구들과 같이 놀고 싶을거다. D는 스스럼 없이 내 손을 잡았다. 너댓살 꼬마들이야 선생님 손잡는 걸 좋아하지만, 이렇게 덩치 큰 사내 놈이 애기처럼 손을 꼭 잡고 걷는데 우습기도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아이는 꼭 잡은 손을 머리 위로 휘두르며 크게 원을 그린다. 아직은 키 차이에 손이 풀리기도 했다. 복도가 쩌렁쩌렁하게 웃으며 잡는다. 그게 뭐 그리 재미있는지... 교실에 남겠다고 고집부린 기억은 사라지고 마냥 웃고 있다. 한국에서 말하는, 정이 많고 착한 아이 같다. 사실 속으로 많이 난감했다. 난 보드 게임을 할 줄 모른다!!! 혼자 공이라도 튕기고 놀면 좋을텐데… 텅 빈 체육관 바닥에 둘이 앉아 게임을 골랐다. 다행히 아이가 꺼내 온 건 징가... 작은 나무 조각들을 쌓아올린 다음 무너지지않게 하나씩 빼기만 하면 되는 게임이다. 많이 해봤는지 제법 잘 한다. 버릇처럼 아이를 관찰한다. 신체적인 문제는 없는것 같다. 손, 발, ..움직임에 지장없고, 시력도, 청력도 좋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손톱과 깨끗한 스포츠 머리에 눈이 간다. 엄마가 잘 챙겨주는구나… 선입견일까. 세상이 이상하다보니, 그리고 통계가 그렇다보니, 중간 이하 그룹의 아이들을 볼때면 혹시 구박받지 않나 위아래 먼저 훑어보게된다. 다행이다. 아이의 쌍꺼플 없는 한국 눈매가 날 바라본다.


“선생님은 어느 학교에요? 나는 PV 다녀요.”

"어, 알아, 선생님 딸들이 그 학교 나왔어.”

“또 뭐 알아요? 내가 한국 사람인거 알아요?”

“알지. 네 성이 한국 성이잖아, 박 씨.”

“선생님도 한국 사람이에요?”

“응, 여기 이름표 봐봐. 나는 장 씨야. 한국 성, 장 씨.”

D가 그제서야 내 명찰을 본다.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다시 영어로) 선생님 한국말 할 수 있어요?”

“그럼, 하지.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아니, 아니, 내가 '(한국말) 안녕하세요' 하면 선생님은 '(한국말) 안녕' 해야지요. 선생님이니까.”

생각보다 한국어를 잘한다. 아마 집에서 부모님이랑 한국어를 쓰겠구나 싶었다. 

“우리집에 놀러와요. 우리집에 만화책이랑 게임 많아요.”


천진난만 하다… 라는 말이, 아마 이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보다. 정말 아무 계산없이 얼굴 가득 번진 미소로 내게 조른다. 친구들이 놀러 오는게 좋다고 한다. 그래, 그렇겠지…네가 갈 수 없으니 누구라도 와서 놀아주면 얼마나 좋겠니… 마음이 아파온다. 많이 심심했나보다. 처음 만난 사람을, 한국 사람이라는 것 만으로 자기 집에 초대해 같이 놀자는 아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일주일이 지나고 교사들의 스케줄이 조정되어 다시 D를 맡지 못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나를 볼때마다 달려와 안기며 내 손을 잡고 휘둘렀다. 

“(한국말로) 안녕, 친구 선생님, 우리 집에 놀러 와!”

 행복해 보이는 아이를 안아주고 뒤돌아 가는 가슴이 먹먹하다. 냉정한 성격 탓에 내 아이들을 위해 울어본 적은 없지만, 남의 아이들 때문에 눈물을 흘릴때가 있다. 나이 탓이기도 할거고, 어쩌면, 뒤늦게 철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래전의 어느날, 한국의 명절에 한 특집 프로그램에서, 어느 고아원 아이가 나온적이 있었다. 한쪽 손에 손가락이 세개 뿐이었다. 나머지는 완벽하게 정상이고, 덤으로 예쁘장한 외모까지… 귀공자형의 ‘요즘 유전자’ 였던 그 아이는, 그 손가락 때문에 고아원에 버려졌다. 그리고 그 아이의 쌍둥이 형 역시, 그 아이는 정말 아무 이상이 없음에도 일난성 쌍둥이인 동생 때문에, 함께 버려졌다. 또래보다 똑똑하고, 성격 좋은 다섯살 형제를 보면서 나는 분노했었다. 미친 년, 놈 찾으며 그 아이들의 부모를 저주했다. %#^$%*@(# 잘먹고 잘 사나 두고 봐라… 시간이 흘러 내가 내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도 그 쌍둥이들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었다. 요즘은 그 아이들이, 학대받는 뉴스 속의 다른 아이들이, 내가 사는 이 곳 미네소타의 수많은 입양아들이, 유독 나를 슬프게 한다. 여전히 화도 나고 욕도 나오지만, 그만큼의 눈물도 숨긴다.      

        

장애아이를 버리는 한국. 참 안된 이야기지만, 그래, 까짓꺼, 멀쩡한 아이도 버리는데…!?? 그 쌍둥이 형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지금이었다면 한국으로 후원금이라도 보내고, 아예 여기로 데리고 오는 방법도 찾아봤을텐데… 이제는 훌쩍 자라 성인이 되었겠지. 언젠가 내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 아이 한두명 쯤 데려오고싶다. 아이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싶다. 오늘도 웹사이트를 뒤적인다. 오래전부터 가입했던 미네소타 주의 입양/포스터 케어 희망 아동들의 리스트다. 언뜻 사진으로 봐서는 분명 한국아이 같은 두세명의 유아들. 모두가 장애나 지병이 있다. 아직은 장애아이들이 감당되지않는 부족한 나를 탓하며, 애써 마음을 다독여본다. 사랑이 넘치는 한국 장애아동 D. 요즘 이민오는 ‘배운 사람들’에 비해 많이 힘들고 어렵겠지만, 정성껏 D를 돌봐주시는 그 부모님이새삼 고맙다. D는 내게 잠시 세상을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영재교육, 명문대학, 고소득 직종… 치열하게 달려왔다. 그 합리화된 명분에 춤추던 한국식 교육을 잠시 제껴둔다. 그저 소박하게, D를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안전하도록, 따뜻하고 싶다. 언젠가는 나도 꼭 힘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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