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 현장
병원과 모텔 사이, 사고 현장으로 추청되는, 정확히 말하자면 사건 일지에 '시신 발견 장소'라고 적어놓은, 그 곳에 섰다. 아스팔트 위에는 별로 남은 게 없다. 스키드 마크도, 핏자국도, 자동차 부품이나 사고의 흔적도... 그런게 있었다 해도, 삼일이나 지났으니 싸그리 치웠을거다. 지역 경찰이 관여했다면 더 깨끗하게, 뭘 들키면 안돼는지 잘 알고 있을테니, 더 신중하게, 꼼꼼히 숨겼을거다. 지고 들어가는 게임을 시작한다..
모텔에서 병원 쪽으로의 수색을 마치고, 길을 건넌다. 병원에서 모텔 쪽으로, 아까와는 반대 방향을 걷는다. 황 순경의 말대로 대략 15미터 쯤 되는 위치에, 사람 모양을 흰 라인으로 그려놨다. 조금씩 분산되어 있는 핏자국이 뒷머리 부상을 가늠케 한다. 아스팔트에서 잔디길로 넘어가는 경사면이다. 미키씨의 하체가 반쯤 경사면으로 기울어진다...
보고서가 사실이라면, 야간에 혼자 걸어가던 미키씨를 누군가 차로 치고 달아났다. 그리고 한참 뒤에 지나가던 아우디가 미키씨를 보고 놀라 피하려다 휘청거리며 경사면 밖으로, 수풀 지역으로 떨어진다. 약 4-5미터를 밀려 내려가 나무에 부딪치면서 엔진에 불이 붙고, 평소 천식을 앓는 운전자가 내려 혼자 불을 끄려다 연기를 맡고 기절한다. 깨어보니 병원이다..
차가 떨어졌다는 곳으로 이동한다. 성인 종아리 길이만큼 자라오른 잡초 사이로 갑자기 바리깡으로 민것 처럼 휑한 공간이 나온다. 자동차 바퀴 두 줄에 깔려 강제로 누워진 풀들이 뿌리를 내보인다. 아직도 군데군데 검은 재가 남았다. 화재 현장은 타다 남은 잔가지와 잡초로 흉물스럽다. 소화기에서 뿜어낸 진득한 분말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견인차가 끌어올렸는지 깊이 패인 바퀴 자국도 그대로다. 인적이 드문 곳이기도 하나, 일부러 현장을 치우지 않았나 싶을 만큼, 잘 보존했다.
견인차 자국을 따라 길로 다시 올라온다. 불에 탄 차량을 끌어올릴때는 이미 사람들이 여러명 있었을거다. 최소한 견인차 운전자, 경찰, 승용차 운전자... 이 많은 발자국 중 누군가 하나쯤은, 진실을 알고 있다. 시환이 경사면에서 사진을 찍는다. 발자국 크기도 대조한다. 비디오로 기록을 남기고 있는 있는 지율을 부른다.
"선배, 이거 보여요? 옆에서 이렇게 봐야 보일까말까하는데, 발자국이에요. 다른 거랑 좀 달라요."
"굽이 없네요. 운동화라고 쳐도 아무 무늬없이 밋밋하고.. 홍창 (통가죽으로 된 밑창) 일까요? 아니면 현장에서 쓰는 덧신..?"
"저도 그렇게 보여요. 근데 아까 저쪽에서도 똑같은 게 보여서 하나 찍어놨거든요. 그때도 약간 아래로 밀리는게, 미끄러졌거나 술이 취했나보다고 생각했었어요. 자국이 길지 않고, 완전히 넘어진 흔적은 없는 걸로 봐서 약간 비틀거리는 정도인데, 신발 모양을 보세요."
시환이 사진을 확대한다.
"발 볼 넓이에 비해서 앞쪽이 많이 뾰족하게 나왔어요. 경찰들 덧신으로는 이런 모양이 안나와요. 남자 구두맞아요, 정장 스타일이고 앞이 많이 뾰족한.. 그리고 아까 차량도 아우디 Q7이구요."
"잘 어울리네요,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외제차에, 홍창을 쓰는 고가의 명품 구두... 딱이네."
"불난 건 어떻게 보세요? 가짜죠?"
"119도 부르지 않았어요. 하필 혼자 있는 교통사고 현장에서, 정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불이에요. 지들끼리 잠깐 태우는 척 하고 껐겠죠. 보세요, 이쪽 나무랑 전부 다, 그을리기만 했지, 진짜로 탄 건 하나도 없어요. 차량이 확보되면 정밀 분석 들어가야겠어요. 그리고, 저기.. 좀 많이 이상하지 않아요?"
소화기 분말이 뿜어진 곳을 가르킨다.
"자국으로 봐서, 차가 서있던 건 분명히 여기인데, 소화기를 이쪽에서 저쪽까지 뿌렸어요. 거의 5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데, 불이 저기까지 번지지는 않았을거든요. 봐요, 저쪽 나무들은 그을림이 전혀 없어요."
지율이 가르키는 대로 따라가며 연신 사진을 찍는다. 앞서 내려간 지율이 바닥을 살피며, 소화기 분말을 잔뜩 덮어쓴 풀 한 움큼을 주워올린다.
"가운데가 뜯어져 있어요. 이만큼 반경 안에 사람이 있었을거에요. 그 사람, 아마도 피해자... 가 맨손으로 풀을 뜯었겠죠, 낮은 자세... 누워있거나 엎드린 자세요... 그 이후에 여자를 옮기고, 다른 증거를 없에려고 소화기로 덮었어요. 아마 어두워서 풀이 뽑힌 걸 못 봤을거에요. 뭔지 모르지만, 그냥 다 같이, 한꺼번에 덮었어요.. 지들이 원하던 대로 증거가 될만한 건 다 가려졌지만, 덕분에 뜯어진 풀은 날아가지 못하고 다 엉켜붙어서 그 자리에 남았네요..."
/재구성 -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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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운전자가 길 가를 걷던 여자를 발견한다. 시비를 걸며 천천히 다가가 차로 한번 쿵... 민다. 범퍼에 무릎을 부딪히며 넘어지는 미키, 뒷머리에 찰과상이 생긴다. 바닥에 흐르는 피... 번쩍거리며 겁을 주는 헤드라이트를 보고 도망가려고 일어나지만, 무릎이 아파 똑바로 서지 못한다. 엉거주춤하게 구부린 낮은 자세로 몇걸음 간신히 이동한다. 슬슬 뒤에서 따라오던 차량이 아까보다 더 세게 쿵... 허리도 펴지 못하고 골반 뼈를 들이받히면서 수풀쪽으로 튕겨나가고, 술기운에 살짝 중심을 잃은 차량도 함께 길 옆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튕겨나간 여자는 어둠 속의 나무 둔치나 돌 같은 장애물에 부딪혀 갈비뼈를 다친다. 짜증난 운전자가 욕설을 하며 내린다. 차를 먼저 살펴보고 튕겨나간 여자를 찾는다. 뭔가 확인하려고? 화풀이로 폭행이라도 하려고? 겁만 주려고? 아니면, 강간...? 어쩌면 처음부터 강간을 목적으로 따라 다녔을까... 장난처럼 살살 밀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크게 다친 미키를 보고, 놀란다 혹은 겁을 먹는다..?
경찰이나 구급대에 신고하지 않고, 지인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그의 조언을 듣고 은폐할 방법을 찾는다... 부상으로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을 미키는 남자를 올려다 보며,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풀이라도 한 줌씩 잡아 당기며 기어간다... 혹은 도망간다..? 죽어가는 여자의 눈앞에서 왔다갔다 점점 시야에서 흐려지는 명품 구두.. 한명, 혹은 여러명...?
웃었을까.. 죽어가는 그녀를, 일본어로 도움을 청했을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었을까... 오버랩 된다. 새끼야, 내 눈에 띄었으니 넌 죽은거야... 어둠 속에 살짝 반짝였을지도 모르는 겁에 질린 눈동자를 노려보며, 그 놈처럼 그렇게 기세등등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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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다. 미키씨 사건으로 집중한다.
"피해자가 살아있었을때, 일어서 보려고, 아니면 도망가려고 애쓰면서 몇 줌 뜯었을 것 같아요. 용의자는 서있는 채로 지켜봤을테니 미처 알지 못했고, 그러다가 지인들이 와서 스토리를 만들면서... 여자를 아까 길가의 첫번째 혈흔이 묻은 곳으로 옮겨서 뺑소니로 위장하구요.."
"개중에 티비를 많이 봤거나, 범죄를 잘 아는 누군가가 그랬겠죠, 혹시 이쪽에 혈흔이라든지, 머리카락 같은게 남았을지도 모르니까 차량용 소화기로 덮어버리자... 그럴려면 약간의 불장난이 필요했을거에요, 나름 머리를 쓴 핑계거리요. 불이 나서 소화기를 썼다.."
"아무리 그래도... 나무에 들이박았다는게, 겨우 저 정도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는데 엔진에 불이 났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되요."
"여자를 발견 했다는 자리도 거짓말이에요. 보통 차에 치이는 순간에 조금이라도 튕겨나가기 때문에, 뺑소니로 사망할만큼 세게 부딪혔다면 혈흔에 패턴이 생겨요. 차에 닿으면서 피부 조직이 상하면 멍이 들거나, 갑자기 열리는 그 순간에 피가 먼저 터져나오고, 점선을 그리면서 위에서 떨어져 내려요. 바닥에 닿으면서 한두번 튕기거나 밀려나가면서 마찰이 생기구요, 그러고 나서야 정지를 하게 되죠.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에 시간을 지체하게 되는 한 자리에서, 다량의 출혈이 보여져야 하는데..."
"길에 남은 혈흔으로는 사망할 만큼의 양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보시는 거죠?"
"절대 사망할 만큼도 아니고, 미키씨 몸에 난 상처 어디에서도 그만큼의 충격을 받은 멍자국이나 출혈이 생길 만틈 터진 상처가 없어요. 부검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폐나 복강으로 상당량이 고여 있을거에요. 내출혈이요."
"저도, 생각보다 많이 긴 시간을, 살아있었을거라고 확신합니다."
"아까, 의사 소견서요, 부러진게 7번 늑골부터 10번까지에요. 그게 다 부러져서 폐에 꽂혀있다고 해도, 심장이 아니라 왼쪽 폐의 약 1/3 아랫쪽이에요. 그런 정도로 바로 죽지 않잖아요."
"옮겼으면 살릴 수 있었을건데 죽게 놔뒀겠죠. 과다출혈이나 목 부상이 아니고, 호흡 곤란이었겠네요, 저산소증.. 근데 벌써 시신에 가스도 많이 올라왔던데, 수습할때 혈액 다 빼냈으면 어쩌죠?"
"기록으로 남겼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그날 수습한 사람을 찾아서 확인해야죠. 복부에 고인 거는 체액 빼면서 인위적으로 같이 뺄수 있다고 해도, 폐에 찬 것 까지는 안 건들였을거에요. 부검도 아니고, 무연고 시신을 그렇게까지 신경 쓸까요?"
"라인 바로 치고, 감식반 부르겠습니다. 이 주변 풀 전부 쓸어다가 미키씨 유전자 나오는지 해보고.. 시신 양도 받아서 부검 진행하도록 요청하구요. 오늘 내에 국과수에 넘길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팀장님께 전화 해볼께요. 이젠 우리 사건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라서, 시신 양도가 쉽지 않을 거에요. 대사관이나 일본에 있는 가족들한테 요청받고 진행해야죠. 아까 운전자 통화 기록이랑 카드 조회 부탁했는데, 그것도 됬을지 모르겠어요."
"관할 파출소 통하지 않고, 경기 북부 경찰청으로 바로 연락할까 합니다. 경찰이 개입되어 있다면, 설악이든 청평이든, 두 파출소 모두 수사에서 배제시키려구요."
"그래야죠. 파출소 통해서 조작했다면, 가평 경찰서도 꺼림직해요. 우리가 찾고 다니는 거 벌써 들었을거고, 한다리 두다리 건너서, 점점 더 윗선에 아는 사람 끌어들일거에요. 저쪽이 손 쓰기 전에, 북부청에 협조 요청하는게 맞는 것 같아요. 팀장님께 말씀드릴께요."
"아이고, 자식들.. 이정도만 하고 자백하면 좋은데, 버티다 검찰까지 가겠죠? 언제까지 안들킬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외국인이고, 소지품도, 연락처도 없고.. 연고가 없으니 찾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안심했겠죠. 근처 종교에 단체들이 많으니까, 종교에 미쳐서 흔적없이 사라지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봤을거고... 혼자 다니는 외국 여자 하나쯤이야, 쉽죠. 어쩌면, 다른데로 싸들고 가서 유기 하지 않고, 그냥 이 자리에 가만 놔둬준것도.. 고마운 걸 지도 몰라요."
시환이 한숨을 쉬며 차로 올라 가고, 지율은 석호에게 전화를 건다.
"뭐 나온거 있어요? 병원이나 통화 기록은요?"
"병원에 연락했고, 당일 진료 한 의료진하고 CCTV... 전부 협조 하겠다고 하니까, 한두시간 내로 연락 갈거야. 그리고 그 사람, 그날 밤 12시 02분에 자기 아버지하고 최초 통화를 했어. 이후로 네 통 더 왔다갔다 하고 나서, 통화 기록이 없어. 하지 말라고 했던지, 아니면 그새 해결사가 나타났던지.."
"사건일지에는, 기절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미키씨가 사망한 정확한 이유와 시간을 모른다고 잡아떼려는 겁니다."
"그렇겠네. 누가 시켰는지 스토리는 그럴듯해. 지금 그 아버지 통화 내역 요청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 아버지가 군의원 출신에 국회의원까지 몇번 출마했던 사람이야. 할아버지는 전에 경기도 교육청장을 지냈대. 경찰 뿐 아니라, 그 지역에 아는 사람이 많을거야. 쉽게 털어놓지도 않을거고."
"최대한 증거 찾아놓고, 경기 경찰청으로 사건 이송해야겠습니다. 대사관 측에는요? 전달 됐습니까? 그쪽에서 관여하면, 더이상의 위증은 못하지 않을까요?"
"글쎄, 자식 감빵 가는 문제인데, 그까짓 대사관이 무섭겠어? 일단, 알았고, 경기 북부 경찰청에 지원 요청 해 놓을께. 그래도 아마 가평 경찰서에서 먼저 나올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밥은 먹었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은 건 또 뭐야.. 챙겨먹으면서 하고... 다시 통화해. 카드 조회 중이니까 결과 나오면 바로 보내줄께."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시오."
띵... 오 경사에게서 문자가 온다.
/차량 확보. 안전한 곳으로 이송 중/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