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다 그런거겠지?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창피한, 사춘기 열꽃같은 그런 짝사랑 있잖아. 아팠냐고? 아니, 전혀. 아쉬웠냐고?? 그것도 아니었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냐 하면, 역시나 그것도 참.. 어디가서 떳떳하게 내 여자입니다, 소개 한번 못 해 본 답답이였잖아. 못났나? 조금 부족했지? 너한테 비하면 참 많이 보잘것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정도 인연이면 충분하다고 믿었어. 형제같은 절친 놈이 소개해준 후배.. 나 주기 아깝지만 눈물을 머금고 넘긴다는 엄살에, 별 관심없는 척, 그래 한번 만나나 볼까.. 시간 쪼개서 나가주는 거다 생색만 내는 자리였는데.. 괜찮은 학교에 괜찮은 외모, 괜찮은 성격… 첫 만남부터 집에 가기 싫어 이 핑계 저핑계… 시간 질질 끄는 내가 부끄러웠어.
자주는 아니어도 꾸준히 만났잖아. 잘 통했으니까. 카페 대신 전통 찻집, 영화 대신 뮤지컬이나 연극, 오락실 대신 서점.. 볼링장보다 서울 근교로 드라이브를 갔었지. 남들이 다 해주는 그런거 말고, 특별한 걸 해주고 싶었어. 진심이었는데… 알고 있었니? 최선을 다하고도 늘 뭔가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걱정 반, 후회 반으로 다음날까지 잠도 못잤어.
설레임에 너무 일찍 나와 걷다가, 약속 장소가 아닌 학교 정문까지 가기도 했었어. 쑥스러워서 덥썩덥썩 안겨주지 못한 선물은 가방에 몰래 넣어두고, 나중에 열어봐라.. 태연한 척… 툭… 요즘말로 츤데레, 이전 말로 쑥맥이었지. 그 두 단어가 은근히 비슷하다는 것도 십년은 지나고 나서야 알았어. 눈도 못 마주칠 만큼 가슴이 쿵쾅거리는게 기분은 좋았지만, 말로 할 수 없어 숨긴거야.
“내려와. 다 왔어.”
희안하게도, 우린 미리 약속하는 그런건 없었지. 그냥 보고싶으면 언제든, 집 앞으로, 학교 앞으로.. 알바하던 학원 앞으로.. 그럴때마다 천리안이라도 가졌는지, 당황하지않고 자연스럽게 따라 나서던 너... 혹시 기다렸니? 친구도 많고, 남자 선배도 많았잖아. 그래도 약속있다, 바쁘다… 단 한번도 그런 이유로 거절한 적 없었어. 그린 라이트였을거야... 바보처럼 내가 망설인거고.
말 뿐인 남사친, 여사친.. 아주 조금 오바해서 친한 오빠까지 승진했지만, 진전이 없었어. 다들 흔한 이유 하나씩 있잖아. 군대, 대학원, 직장 아니면 유학.. 감히 결혼을 이야기하기에는 그전에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아 보였던 20대였어. 남들이 우와~~ 감탄할 만한 멋진걸 이루고 나서 사귀자, 결혼하자, 당당하고 싶던 자존심도 있었고.. 그땐 뭘 믿고 서른 셋이라고 했을까.
꿈의 나이 서른 셋.. 뭐라도 되어있을 줄 알았어. 창창한 직장도 잡고, 부모님 아닌 내 이름으로 전세 대출을 받고, 아마도 새 차 한대쯤 다시 뽑았을.. 그런 안정적인 미래일거라고 믿었나봐. 지금 생각하면 결코 아닌데 말이야. 서른 셋이면 가장 치열하게 달리고 있을, 그러면서도 아직 목표물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간신히 어린 티를 벗은 철부지 야생마처럼 세상물정 모르고 여기저기 부딪치고 다닐, 겨우 그런 시기인걸.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와. 서른 셋까지 기다릴께.”
멋 모르고 기다린다고 한거야. 아니지.. 아마 너무 멋 부리느라 그렇게 말했을 거야. 진심은 그게 아닌데, 여유 있는 척, 만만한 척.. 두살 많아도 엄청 오빠인척 하고 싶었겠지. 아, 말은 그렇게 해놓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그냥 떼 쓸걸 그랬어. 가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옆에 딱 붙어 날 떠나지 말라고 사실대로 말할 걸.. 서른 셋 아니고, 삼년, 세달.. 겨우 고만큼만 기다린다고 할 걸 말이야.
속마음하고 다르게 ‘척’ 하다가 잃은게 많았어. 다른 남자하고 콘서트가는 것도 쿨한 척 그러라고 했었지. 회식이 늦게 끝나 새벽녁에야 택시 잡고 있다는 말에도 그래, 고생했다, 한마디였고.. 찝쩍거리는 놈들이 많아 귀찮아 할때도, 만나봐라,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텅 빈 조언만 던져 놓고, 사실 그러고 나서 안절부절 정말 다른 놈 만나면 어쩌나.. 혼자 고민했었어.
왜 그랬을까.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진심으로 한대 쥐어박을거야. 절친 놈이 그랬던 것처럼, 어이그, 븅신아.. 너 죽을때까지 후회한다.. 플랭카드에 써서 방에 붙여놓고 되새길거야. 그까짓 대기업이 뭐라고, 학위가 뭐고, 고시가 뭐라고 그렇게 미뤘는지.. 안되면 창피할까봐 미리 말을 못했어. 미안해. 조금 소원해졌다 오해했을만도 해. 대신, 뭐든 붙으면 짜잔…하고 놀래켜주려고 했는데.. 사랑한다 이야기하고 정식으로 사귀자.. 하고 싶었는데..
“유학가. 내일 아침 비행기... 얼굴 한번 보고 갈 줄 알았는데, 많이 바쁜가보다. 그동안 고마웠어. 내가 오빠 많이 좋아했었는데, 잘 표현을 못했나봐. 몰랐지? 서운한거 있었으면 미안해. 어려서 그랬어..”
그 짜잔을 내가 당했어. 시험 준비로 깜빡 정신이 팔려있다가... 뒤늦게 확인한 음성 메세지를 듣고 또 듣고..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확인 해보고.. 그렇게 어이없는 일은 처음이었어. 8년.. 내 20대의 대부분을 함께 했는데… 매일은 아니었어도, 그래도 숨쉬고 눈뜨는 모든 순간을 열배백배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던 신비한 너였는데.. 정신차려보니 없더라.
담담한 척, 괜찮은 척.. 배려한답시고 편한 오빠인 척 연기하던 그 모든 것들이 독이 된거야. 참지 말걸 그랬어. 하숙집 문이 잠겨 모텔에 갔을때도, 바다 본다 멀리 갔다가 살짝 취했을 때도.. 친구들과 1박2일 여행갔다 둘만 남았을때도… 밤새 공부했다며 내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을 때에도.. 뭐라도 할 기회는 정말 많았는데.. 무슨 성인 군자라고 그걸 참았는지.
소원 들어주기 내기 당구를 이기고도.. 별로 제대로 된 소원을 말하지 못했어. 저녁은 네가 사라.. 진짜 소원은 그게 아니었는데… 정말 볼에 뽀뽀 한번 받고 싶었거든. 그러다 오케이 하면, 첫 키스라는 것도 하고 싶었는데, 말을 못했어. 내가 잘 못 할까봐, 네가 거절 할까봐.. 하고나서 다음날부터 연락 안 할까봐.. 좋은 남자인 척, 흑심 없는 척 했던 거야.
“미안해, 또 늦었지.”
“아냐, 내가 일찍 왔어. 오빠 원래 늦잖아.”
시차라고 했어. 습관적으로, 늘, 항상, 매번 늦는 나한테, 네가 그랬었지, ‘나만의 시차’가 있어서 그런거라고. 너는 괜찮다고, 그러니까 중요한 일에만 늦지 말라고.. 상대편의 시차에 맞춰야 할때도 있는거라고 제법 어른처럼 나를 타일렀어. 그 말이 주문처럼, 마법처럼 평생 뇌리에 박혔다. 군대에서도, 직장에서도.. 지금까지도 너를 잊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남아있어.
물어보고 싶어. 한번만 더 만나게 된다면, 지나가다 어, 혹시…? 하고 알아본다면.. 그때 왜 그냥 떠났냐고.. 물어볼거야. 시차 때문에.. 늦는 거, 망설이는 거, 주저하는 거 다 알면서 왜 한번 더 안 불러주고 그냥 가버렸는지 알고 싶어. 꼭 한번만 기회를 더 줬으면, 정말 그때 딱 4일만 더 기다려줬으면 시험 끝나자마자 바로 연락했을건데.. 그랬으면 그 합격증이 그렇게 서글프지 않았을텐데..
마흔이겠다. 스물에 만나 여덟에 떠나고, 별 특이할 것 없던 서른 셋을 지나 마흔이 되었겠지. 다시 볼 수 있을까? 나, 많이 달라졌다. 전보다 빠릿해지고, 승진도 하고.. 제법 어른 노릇은 하는데, 아직 네가 생각나. 오해는 하지마. 그냥 궁금한거야. 첫 사랑이잖아. 잘 사는지, 여전한지.. 요즘도 그때처럼 술을 잘 마시는지.. 그런거.
정말로 어떻게 사니? 건너건너 소식 한번 들을만도 한데... 어디에 꽁꽁 숨어 사는거야? 남들은 찾고 싶은 사람 다 수소문해서 찾는다는데, 그것도 못하겠어. 시간이 더 필요한가? 용기도, 그리움도.. 아직은 인터넷 무섭고, 뒷말 무섭고.. 혹시라도 너한테 피해 갈까 무서워. 안 하는게 낫겠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소극적이야. 아직도 못 고친다.
아프지도, 슬프지도 못했던 밋밋한 첫사랑이래도.. 가슴에 꼭 박아놓고 1분 1초마다 너를 센다. 용서해. 너한테 당당하고 싶어 잠수타던 철없던 나를.. 건강했으면 좋겠어. 행복했으면 좋겠고, 가끔 날 떠올렸으면 더 좋겠고.. 혹시나 생각나면, 뜬금없이 보고 싶으면.. 그냥 훅 찾아와. 괜찮아, 늦어도 돼. 이번에는 내가 기다리니까. 지금처럼 꼼짝않고 여기 있을께.
나도 너한테, 기억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좋은 기억으로만 남은 사람.. 첫사랑이라고 불리워도 괜찮은 사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