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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19. 2017

새순이 돋을 때 비로소 떨어지는 낙엽이 있습니다.

쉴만한 물가 - 211호

20170219 - 새순이 돋을 때 비로소 떨어지는 낙엽이 있습니다. 


여름내내 푸르던 잎이 가을이면 오색 단풍으로 물들어 갑니다. 과학적으로는 나무가 겨울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온이 낮아지면서 나뭇잎들은 광합성 작용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더이상 양분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나뭇잎의 세포들은 계속 양분을 소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무에게 버거운 존재로 변해갑니다. 여름내내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데 큰 도움을 준 나뭇잎이 가을이 되면 힘겨운 집이 되는 것입니다. 광합성을 못하면 엽록소가 파괴되고 그럼 나무는 잎자루를 막아 양분이 통하는 길을 차단하게 됩니다. 그럼 기존에 나뭇잎에 남아 있던 엽록소는 햇볕에 파괴되면서 줄어들기 때문에 잎의 색깔이 변하게 되고 이 때 나뭇잎은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던 다른 색소들이 두드러져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다양한 색소들이 결합해서 단풍의 색을 더 짙게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뭇잎이 더 왕성하게 나무를 위해 광합성 작용을 하고 희생한 잎일수록 엽록소를 잃어버리는 것이 많아서 갈색으로 탈색되는 것 같습니다. 가을날 그토록 화려한 잎들은 어쩌면 마지막 힘을 다하고 떠나는 잎들의 아쉬움이 가득 담겨진 마음의 색깔인 것입니다. 그토록 화려한 이면에는 한여름 온 몸을 다 불사르고 산화한 수고의 끝을 장식하는 메달과 같습니다. 그렇게 제역할을 다 한 후에는 나무를 위해 기꺼이 제몸을 떨구어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며칠 고로쇠 채취를 위해서 산에 오르내리는데 여전히 탈색된 잎이 떨어지지 않고 꽃샘추위의 새찬 바람에도 계속 나무에 붙어 있는 잎들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단풍나무 잎도 있고 도토리과의 나무들도 일부 그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실수로 붙어 있나 싶어서 그 잎을 당겨 보았는데 접착력이 상당했습니다. 아직 떨어질 때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자료들을 찾아보았는데 코끝이 찡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늦가을이면 찬바람에 모든 잎새들을 다 떨구게 됩니다. 그런데 일부의 나무들은 초봄을 지나 근 4월 새순이 돋을 때까지 잎을 떨구지 않습니다. 그런 잎들은 줄기 밑둥에 장차 새순이 돋고 열매를 맺을 순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늦가을 쯤에 벌써 둥지를 틀게 되는데 그대로 잎이 떨어지고 겨울에 찬바람을 맞게 되면 새순이 녹거나 죽게되어서 정작 봄이 올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싹을 틔우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린 순과 둥지를 찬겨울동안 보호하기 위해서 마지막 남은 에너지까지 다 쏟아가며 줄기에 붙어 있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봄이 와서 더이상 보호가 필요없게 되고, 그래서 새순이 고개를 내어 밀고 스스로 클 수 있게 될 때는 아낌없이 제 한몸을 떨구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원추리도 비슷한 모성애를 가진 꽃이라고 합니다. 꽃이 피면 그리 오래가지 못해 시들고, 잎도 가을이 되면 시들지만 정작 잎을 떨구지 않고 겨우내내 붙어 있다고 초봄에 비가 오면 그제서야 온잎을 다 떨궈서 자라나는 새순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거름이 되어준다고 합니다. 


쭈굴거린 손과, 검버섯이 핀 얼굴, 깊어가는 주름과 이빨이 다 헤어져 오그라든 입. 하얀 서리가 온 것처럼 새어버린 머리, 평생을 업드려 일하시느라 구부렸다가 다시 펴지지 않고 꾸부정해진 허리, 수없이 일터를 오가며 연골이 다 닳도록 걸으며 일하시느라 애리고 굳은 무릎, 다 닳아 거의 빠져버린 손발톱. 어떤 이는 치매까지 와서 자녀도 알아보지 못한 채로 사는 분도 계시고, 오랜 지병으로 병상에 누워계신 분도 계시고, 지금도 생사를 헤매며 생명을 연명하고 계신분도 계실 것이고… 그렇게 평생을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쓴 그 부모님들이 제 역할 다 한 것 같은데도 여전히 우리곁에 남아 있는 이유를 봄까지 남아 있는 그 잎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프고 늙은 부모님 때문에 내가 매이고 무엇을 못하고 제약이 되고 짐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아픈 이유도 우리를 기르시느라 기력을 다 쓰셔서 그렇고, 아직도 부모는, 아니 생을 마감하는 그 때까지도 부모는 우리를 위해 주꾸러진 나뭇잎같은 그 몸으로도 마지막 남은 애정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자녀들은 함께 있을 땐 모르다가 마침내 부모님이 떠나신 후에야 그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모님께 못다한 효를 다시 자녀에게 쏟아내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랑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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