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7:01-10
예레미야 37:01-10 예루살렘의 멸망 1 ; 피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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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기야는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으로 세운 왕입니다. 그 시대 누구도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시드기야는 나라의 위기가 자초하자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의지한 애굽은 돌아가고 갈대아인이 와서 이 성을 빼앗아 불사르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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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장부터 44장까지는 시드기야 통치 후반부터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하고 일부 남은 자들이 애굽으로 도망하기까지의 기간을 시대적 배경으로 갖습니다. 이 장들은 예레미야가 담당했던 역할과 그의 예언자적 수난에 초점을 맞춥니다. 유다 마지막 날들의 혼란과 절망적 상황을 상세하고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열왕기하 24:18-25:26은 예레미야에 관한 언급 없이 이 기간을 간략하게 기술합니다.
유다의 멸망 직전과 직후를 다루는 37-44장이 연대기적으로 그보다 거의 17/18년 전의 이야기를 다루는 36장 다음에 연속되고 있음은 물론 편집자의 의도에 속합니다. 어떤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에 태워버리는 여호야김과 그의 신하들의 태도가 야훼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결정적으로 만들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야김은 심판을 선언한 예언자 우리야를 죽여버립니다(26:20-23).] 하나님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절대화된 예루살렘의 왕권과 교만 앞에 예루살렘과 유다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서 있을 자리가 없게 됩니다.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린 다윗왕조에게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관계의 청산을 선언하시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바벨론에 넘기십니다.
예언자의 신탁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잘라 화로 불에 던지는 여호야김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 책에 따라 전심으로 예루살렘의 종교를 정화시켜 므낫세의 죄로 확정된 유다의 멸망을 연기시킬 수 있었던 그의 아버지 요시야에 대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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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백성이기 원합니다.
1-2절은 37장-45장의 도입부 역할을 하며 뒤따르는 장들을 26-36장(의 심판 선언)에 연결시켜 준다. 1절은 먼저 시드기야의 왕권에 관해 기술합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고니야)을 포로로 잡아가고 대신 앉힌 왕이 그의 삼촌 시드기야였습니다.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보좌에 앉혀졌기에 그의 왕권은 처음부터 안정적이지 못했습니다. 2절은 포괄적으로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의 불순종을 고발합니다. 예레미야의 선포는 예루살렘의 정치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 의해서도 거절됩니다.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귀를 갖고 있는 자들을 찾지 못합니다.
시드기야와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시작 되었을지, 왜 이토록 온 백성이 모두다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하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도 살펴보면 주님이 허락하신 광야의 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께만 집중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바라며 살아가길 기도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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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여호와께서는 가증한 일에 대해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자유로운 몸으로 있을 때(4절), 바로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해 출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고 떠났을 때(5절) 시드기야는 신하를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3절). 중보기도는 예언자의 기본적 기능에 속합니다. 심판이 확정적이기에 예레미야는 앞에서 여러 번 중보기도의 중지를 명령받았습니다(cf. 7:16; 11:14; 14:7-9). 뒤따르는 절들은 왕이 구한 것이 ‘이스라엘 편에 서서’ 드려지는 중보기도가 아니라 신탁의 요청임을 보여줍니다.
주전 589-570에 애굽을 통치한 바로 호프라(Hophra)는 포위된 예루살렘을 구출하기 위해 주전 588년에 군대를 동원해 원정을 떠납니다(cf. 34:21). 애굽 군대를 막기 위해 느부갓네살은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의 포위를 풉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애굽 원정군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격퇴되고 예루살렘은 이제 완전히 고립무원이 됩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기도는 가증하고, 아쉬울 때만 찾는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일 뿐입니다. 시온 불패의 거짓 신학도 문제지만, ‘우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잘못된 신학은 더 큰 문제입니다. 문제가 사라지길 구하기보다 문제의 원인이 나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 우선입니다.”_매일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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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의 허망한 낙관론에 엄중한 경고를 전합니다.
바로 군대의 출정에 소망을 두는 시드기야에게 야훼께서는 이들이 애굽으로 도망하고(7절) 바벨론의 군대는 반드시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불태워 버릴 것을 선포하십니다(8절). 야훼께서 예루살렘에 내리시기로 결정한 심판은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은 사람들의 막연히 들뜬 기대감과 소망에 찬물을 끼얹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 장면에 나오는 것처럼, 예레미야가 체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애굽 군대의 출정과 바벨론 군대의 철군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해방의 기대감을 심어주었습니다(9절).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노골적으로 대적합니다. 애굽의 원정군 파견에서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읽는 구원예언자들은 더욱 더 큰 목소리로 바벨론의 굴레로부터의 임박한 해방을 선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일시적인 호전에 들떠 상황을 오도하지 말 것을 경고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확정된 것으로 어떻게 해서도 이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10절). 바벨론 군대가 패하여 부상자들만 남는다 할지라도 이들이 진영에서 일어나 예루살렘 성을 잿더미로 만들 것입니다.
허망한 낙관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오만과 오판, 자신을 기만하는 신앙, 반성없는 긍정신학, 미래에 대한 막연한 장미빛 기대,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허튼 생각들 모두 경계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모두다 경계해야 할 부질없고 허망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 하나님보다 더 든든하고 현실적이고 기고만장해할 많은 것들이 허다합니다. 이 모든 우상을 타파하고 오직 주님으로만 만족하고 주님만을 기대하며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온전히 따를 사람? 과연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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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여전히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모든 열방의 주권적 통치자이심을 믿습니다.
주의 말씀을 존중하고
주의 말씀을 통해 상황을 바로 해석할 수 있는 지혜도 주옵소서.
시대를 분별하고, 허탄한 데 빠지지 않고
우리가 서야 할 자리, 피해야 할 곳
하나님의 때를 아는 지혜 또한 주옵소서.
부질없는 것들에 우리의 마음과 소망을 두지 않게 하옵시며
오직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우리 주님께만 향하게 하옵시며
주님의 신실하심과 주님의 소망과
주님의 사랑에 우리의 기대를 두게 하옵소서.
어그러진 것들 속에
내게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돌아보는 자세도
그러한 성찰과 안목도 허락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