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만한 물가 - 67호
20130628 - 향기
발동기가 요란한 날 오후 느지막한 시간이 되면 구수한 그 냄새가 어김없이 났습니다. 탈곡을 마치고 나면 남은 보릿대랑 쭉정이를 태웠으니까요. 저는 보릿대 타는 냄새를 참 좋아합니다. 가끔 차를 몰고 가다가 길옆 논 밭에서 자욱한 연기가 올라오는 곳을 지날 때면 저는 일부러 차를 연기 속으로 천천히 몰고 갑니다. 그 냄새를 맡으면 어느새 어릴 적
고향 그 보릿대 타는 연기 자욱한 석양의 그림 속에 들어 가 있음을 느낍니다. 굴뚝마다 저녁을 짓느라 연기가 오르고 있는 그 아련한 저녁 풍경 속 포근함에 젖어듭니다.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마음속의 본향을 상기하게 하는 향기입니다.
우리의 뇌 속에는 냄새로 자극해서 잊혀진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자 껍질을 벗기면 나는 냄새, 소에게 줄 풀을 베어다가 작두에 썰 때 나는 냄새, 두엄을 만들기 위해서 마당에 깔아 놓은 거름 냄새, 모내기를 끝내고 난 뒤에 논에서 나는 냄새, 낙엽을 태우는 냄새, 햇볕 쨍쨍하던 날 마당에 후드득 갑작스레 소나기가 올 때 나는 냄새.... 어느 날엔가 불쑥 비슷한 냄새를 맡게 되면 오래전 잊혀진 기억들이 잔잔하게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마다 향기에 대한 잊혀진 기억들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벌써 훌쩍 커버렸지만 둘째 딸 노아는 아기였을 때 유난히 냄새에 민감했었습니다. 잠자리에 들 때면 엄마랑 아빠, 그리고 언니랑 자기 베개를 다 구분해 놓습니다. 가끔 내가 베고 있는 베개가 엄마 꺼라며 바꾸기도 했고, 제가 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아빠 베개를 옆에 두고서 아빠 자리라며 그렇게 잠이 들어 있는 노아를 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불쑥 우리 아이가 아빠의 체취를 통해 좋은 기억을 떠올 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보는 작은 욕심을 부려보기도 했었습니다.
향기로부터 떠올리는 것은 아련한 추억뿐 아니라 사람도 있습니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나면 멀리 떠나신 아버지가 생각나신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어릴 적 선생님에게서 맡았던 그런 향수라고 하면서 선물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이발소에서 비누 거품 냄새를 맡을 때면 나는 시골 이발소 아저씨 등등...
힘들고 어려울 때뿐 아니라 기쁘고 즐거울 때도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 삼겹살 먹을 때만 생각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할 때 생각나는 사람. 넓은 바다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 높다란 산을 보면 생각이 나는 사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생각이 나는 사람, 파란 하늘을 보면 생각나는 그런 사림이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향기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한두 번의 마음 가지고서는 안되고 늘상 변함없는 삶이 아름답게 이어질 때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한 해의 절반을 지내고 다시 반년을 시작하는 즈음 혼돈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변함없이 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면서도 역사의 변곡기에 불의에 동조하지 아니하고 꿋꿋하게 정의 편에 섰던 사람이라는 그 향기로 기억되는 삶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