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만한 물가 - 162호
20150705 - 대주는 것
물꼬에 물 들어가는 것하고 자식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는 것은 아무리 많이 들어가도 아깝지 않단다. 어느 해 지독히도 가물었던 때 기어이 천수답으로 흘러들던 개울이 멈춰 버렸다. 냇가에 흐르는 물도 말 그대로 실개천이 되어버렸으니 산다랑지 논으로 흘러들던 개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갓 자리를 잡아서 한참 물이 있어야 할 논에 하필이면 가뭄이 와서 바싹 타 들어가는 벼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래서 개울에 그나마 남아 있는 웅덩이 물이라도 조금 대주기 위해서 연장을 챙겨서 작정하고 천수답 논으로 갔다. 갈라진 논바닥만큼이나 어머니 마음도 그렇게 갈라져 갔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학교에 다녀온 아이를 데리고 그렇게 가자 하셨을까.
개울에서 천수답으로 들어오는 물고랑은 제법 길었다. 아마도 구불구불 나 있는 고랑들을 재어 보면 근 백여 미터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이 계속 흘렀다면 물고랑도 구멍이 나지 않았을 터인데 진즉에 물이 끊긴 터라 두더지도 파고, 흙이나 바닥도 갈라져서 그대로 물을 댄다면 틈새로 다 새 버리고 정작 논에는 한 방울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행히 구한 통 비닐로 긴 물고랑을 개울까지 댈 수 있었다. 아마 이런 비닐이 제대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여 중간중간 이어서라도 물고랑을 연결했다.
바가지며 양은그릇들로 물을 푸기 시작했다. 그나마 물을 만지면 더위도 가시는 법인데 물이 적어서인지 물속에 있어도 갈증이 났다. 어딘가로 졸졸거리며 흘러가는 물을 잡아보고자 보를 더 단단히 만들고 그 물을 끌어다 대면서 한참을 물고로 보낸 뒤에야 멀리 논에 가보시던 어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물 들어온다!’ 일을 마치고 내려오는 내내 어머니는 애썼다 하시면서 그래도 조금이라도 해갈이 되지 않았겠냐고 격려하신다. 하지만 내 눈으로도 물이 다랑지 논에 간신히 몇 군데 부어졌을 뿐 택도 없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것 만으로도 어머니는 위안 삼으셨다. 그렇게 종일 힘겨운 작업에도 불구하고 물을 조금이라도 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어서 비가 좀 와야 할 텐데 하시면서... 머지않아 가뭄 끝에 비가 와서 붉덩물이 흘러내려 갈라진 논에 먼저 비를 뿌리고 물고를 통해 철철 물이 흘러 들어가던 날 인간의 바둥거리던 그 한계를 한 번의 비로 해결되는 순간 모든 이들에게 물을 대주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들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터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정끝별 님의 시 <세상의 등뼈>
대주는 것은 언뜻 잘 보이지 않는다. 기실 대놓고 대주기보다 대부분 대주는 것들이나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곧추 세우고 지탱해 주거나, 어깨를 받쳐 주거나, 누군가에게 든든한 받침이 되어준다. 우리의 등뼈 또한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받쳐주고 있지 않은가? 자기를 희생하고, 기꺼이 내어주며 셀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마지막에 소년에게 그루터기를 대주었다. 곤두박질치는 절박한 이에게 마음을 대주고, 그런 일을 위해서 먼저 바닥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그렇게 허기진 어떤 영혼에게 따뜻한 밥, 시원한 물 한 모금 대주는 것들 모두 사랑이다. 가물어 가는 우리 사회에 이렇게 물을 대주는 이, 물이 되어 주는 이, 사랑을 대주는 이들이 그나마 해갈하게 하고 살아갈 힘이 되고 다시금 재기할 힘이 되어 주기에, 나도 어느 자리 어떤 이들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