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만한 물가 - 71호
20130726 - 이열치열
작열하는 태양이 지지리 오래도록 긴 여운을 남기며 가물거리는 서쪽 산을 넘어가는 즈음이면 굴뚝 이곳저곳에서는 저녁을 짓느라 연기도 나고, 집 앞마당 한 켠에는 벌써들 모깃불을 피우고서 멍석 깔아 자리를 잡았습니다.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이기 시작하는 저녁이 시작될 즈음이면 땀 흘려 허기진 배를 잡고서 뭔가 시원한 음식을 기다립니다.
큰 가마솥에 육수를 내기 위해서 멸치를 넣었는지 다른 것을 넣었는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멸치가 맞을 것 같습니다. 그도 없었다면 아마 특별한 육수는 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밀가루 반죽을 하시는 모습도 잘 기억에 없습니다. 기억에 남는 거라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큰 솥 옆에 장작불 이글거리고 어머니는 가마솥 옆으로 다리를 올려 앉으셔서 이마에 송글 거리는 땀과 더불어 뜨거운 물속으로 연신 반죽을 뚬벅뚬벅 떼어 넣으시는 장면입니다.
가마솥에는 이미 닳아진 숟가락(요즘에야 감자 깎는 좋은 칼이 있지만 예전에는 숟가락 특히나 많이 긁어서 한편이 닳아진 숟가락이 있었지요. 감자를 긁어서 깎는 데는 그만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박박 긁어 깎으면 감자의 녹말이 튀어서 콧잔등이 하얗게 된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으로 긁은 하지감자(나중에야 이 말이 하지쯤에 나는 감자라는 걸 알았지요)를 동그랗게 썰어 넣어서 끓는 물에 가끔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지요.
그렇게 펄펄 끓는 솥에 연신 떼어 넣은 밀가루 반죽은 어느새 연 노란색으로 익어갔고 떼어 넣기를 다 마치며 필요한 양념들 좀 더 넣으시고 긴 국자로 간장으로 간을 맞추시곤 솥뚜껑 닫아 잠시 불을 조절하면 금세 수제비가 다 끓여졌습니다. 다 끓은 수제비를 큼지막한 사발에 한 그릇씩 퍼서 멍석 깔린 마당으로 가지고 오셨습니다.
옆집 앞집 함께 쓰는 마당이다 보니 자연 이런 음식을 하는 날이면 곧잘 이웃집 어른 한둘은 함께 먹었던 것으로 압니다. 함께 오는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러다 보면 여름날은 곧잘 이웃과 함께 두런두런 별을 노래하는 밤이 되곤 합니다.
한여름 밤이 시원 할리도 없겠지만 국물을 드시는 어른들의 입에서는 국물이 시원하다는 소리도 나옵니다. (뜨거운 국물이 왜 시원한지 이제야 저도 조금 아는 나이가 된 듯싶습니다.)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거기다가 요즘에야 수제비 덩어리가 좀 작아졌지만 그때는 왜 그리 크게만 느껴졌는지 아이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더운 여름에 멍석깐 마당에서 모깃불에 이웃 어른들과 함께 빈딧불이 날아다니고 불벌레 소리 들어가며 먹는 그 수제비는 이열치열 여름을 나는 평생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의 그림들입니다.
별미도 간식도 아닌 주식으로 수제비 한 그릇을 먹어도 배가 불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많은 것을 누리고 먹고살면서도 여전히 불평하고 감사치 아니하는 지금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싶습니다. 특히나 먹거리가 풍족한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네들이 여름을 나는 모습들도 배부른 세상이 되었다 싶은데 한 켠으로는 감사를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 씁쓸하기도 합니다.
지금보다 더 못한 때도 있었음을 기억하며 어느새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우리들의 처지를 때론 감사하면서 힘겨운 시간들 또다시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