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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21. 2019

마태복음 05:01-12 하나님나라 백성이 누리는 의와

마태복음 05:01-12

마태복음 05:01-12 하나님나라 백성이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복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제자들이 누릴 복을 세상과 다른 역설적인 복으로 설명하시면서 제자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강화로 산상수훈의 서두인 팔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무리와 제자들 모두에게 선포한 말씀, 하나님나라가 임하므로 그 나라를 사는 이들에게 나타나고 장차 이루어질 삶의 좋은 열매들입니다. 

더불어 팔복은 점진적인 묘사를 통해서 별개가 아닌 함께 맺어져 가는 것이며 예수님의 길로 이 길로 오라 따르라 부르신 길입니다. 주님이 먼저 가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이며 영광과 고난, 승리와 핍박이 함께하는 길입니다. 주님과 사랑으로 온전한 관계에 있다면 기쁨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길이 아니라 주께서 함께 하시므로 가능한 길이기에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에게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길이며 장차 올 나라에 약속된 길입니다. 



# 1-2절 무리인가? 제자인가?

천국복음에 대한 선포와 사역으로 인해 많은 병자들이 오고, 수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찾아옵니다. 그런 무리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 앉으시는데, 제자들이 나아오자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

마태복음에서는 무리와 제자들이 구분됩니다. 물론 십자가사건이 있기까지 이 무리와 제자들이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오해가 비슷하게 이어져 갑니다. 그런 중에도 주님은 이 제자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가르침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1절에 나온 무리들은 소문을 듣고 나온 무리들로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궁금증을 가지고 나온 무리들로 보입니다. 아직은 주님을 따르는 무리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런 중에도 주님은 이제 하나님나라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역설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에 의해 따르는 자들이 아닌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이 살아가야 할 윤리를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앞에서와 같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처럼, 축복의 산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축복의 약속들을 주시는 것과 같은 장면입니다. 

*

나의 필요를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무리인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는 제자인가? 내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듣기 위한 무리인가? 주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한 제자인가? 주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주님을 따름이 제자가 아닌 단순한 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들어야 할 말씀과 주님의 가르침이 제대로 들어올리 만무합니다. 듣고 싶어하는 말씀을 듣는 무리가 아니라, 정말 주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바르게 들을 수 있는 제자여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 3,10절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들의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의 처음과 끝에 주어지는 복은 ‘천국’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심령이 가난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이 지금 여기서 누릴 복이 천국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

천국(하늘나라, 하나님나라)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할 때 본문에 대한 이해가 더 확실합니다. 복 중에 복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소유로 표현합니다. 하나님나라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한다면 주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고 천국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제자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이 가난하여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심령이라면 더더욱 위에 계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만을 의지하고 따르게 되기에 복있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옳은 일을 위해 박해를 받는 자들,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다가 박해를 받는 것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름이 증명되는 일이기에 그는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박해와 고난을 당하지만 이미 그런 속에서도 주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기에 그는 최고로 복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 땅의 것에 의지할 것이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하고 옳은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이를 향해 세상을 핍박합니다. 그러므로 핍박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이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살아가고 있기에 그는 이미 하나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광야 여정의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감당할 소망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주님 말고 의지하는 것이 너무도 많아서 어느새 주님의 자리는 없고 부질없는 것들로 가득찬 상태는 아닌지요? 주님 아닌 것들은 모두 어느날 아무것도 아니게 사라질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4-7절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가 복있는 자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고,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는 배부를 것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

애통함, 온유함,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등은 모두 세상이 생각하는 복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복되다고 말합니다. 

철저한 상실과 무력함과 절망적 현실의 상황으로 애통해 하는 이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행복하다 합니다. 위로는 장차 받을 복이지만 지금 현재도 이미 하나님이 통치를 따라 사는 이들이기에 위로르를 받게 될 것이기에 복있는 자입니다. 

온유함은 그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억압과 착취로 인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이들은 겸손히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이들은 결국 땅 곧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기에 복된 자들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온전히 알기 위해서 목마른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주어진 복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땅이기보다는 하나님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함께하시고 다스리시는 땅은 어디든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길이 녹녹치 않습니다. 사실 이 길을 우리 힘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역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은 결코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애통함들을 가질 때 당사자도 함께 위로를 받는 복을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갈급한 심령을 주를 향해 토설하고, 끝까지 온유함으로 처신해 가는 인내의 여정이 마침내 약속의 성취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이 길을 멈출 수 없습니다. 



# 8-9절 마음이 청결한 자와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보고,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

마음의 청결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자라고도 합니다. 마땅히 품을 것 이상을 품지 않는 마음도 해당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했습니다(렘 17:9)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합니다(시 53:1). 바울사도는 우리의 마음이 미혹을 받아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고후 11:3). 또한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고도 했습니다. 결국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도, 만날 수도, 사귈수도 없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주를 따르는 일이, 그런 마음의 묵상이 날마다 주를 뵙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미움이 있는곳에, 상처가 있는 곳에, 다툼이 있는 곳에, 불화가 있는 곳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일 또한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평화를 지키는 데에서 더 나아가 평화를 이루는 자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평화는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며, 그래서 평화의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을 닮아 있기에 주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가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닮아가고, 닮아가면 그렇게 열매 맺어갈 것입니다. 

*

분주한 마음, 안팎이 다른 마음, 나뉘어진 마음들 모두 잠잠히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시간을 빼앗고 일상에 끌려 살아가게 만듭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정리된 이들만이 한 마음으로 주를 뵈옵고 주와 동행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흐트러진 일상을 우선순위를 정하고 정리 정돈해야 새 마음으로 새 나라의 새 삶을 주님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오히려 분쟁을 조장하고 분열케하고 정죄하며 담을 쌓아가는 데에 앞장서는 행위들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행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언행심사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하는 지혜와 신중함도 필요하고, 언행일치된 모습도 필요합니다.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사이에서, 그리고 우리와 다른 이들을 향하여서도 다름을 틀림으로 단죄하지 않는 마음들이 화해의 물꼬를 트고 화평을 이뤄갈 수 있으이라 기대합니다. 



# 11-12절 박해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욕먹고, 박해를 당하고, 누명을 당하더라고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간 선지자들도 그렇게 박해 속에서도 묵묵히 이 길을 갔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

세상에 있으나 세상과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 때문에 오해와 비난 그리고 누명과 손해와 박해를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감당하기 힘든 선택과 기로의 순간입니다. 이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삶이 주님이 약속하신 나라의 백성임을 증명하고 지금 당하는 모든 것들을 주님이 채우시고 보상하실 것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족하고 주님의 나라에 거함만으로 우리는 이미 복 곧 주의 나라를 살고 상속받는 최고의 복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능히 이 십자가의 길을 감당해 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베드로는 후에 같은 마음을 교회를 향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벧전 3:8-17)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

사실 지금은 주님때문에 욕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욕을 먹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이 알아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기만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서 받는 박해라야 할진대 말씀을 곡해하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무지한 행보가 내게는 없는지 돌이켜보고, 그런 삶에서 떠나 거룩한 길로 나아가며 행하기 위해 날마다 말씀의 통치와 인도를 세밀하게 받아 살아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는 고요한 시간, 주님의 능력을 덧입는 기도의 시간, 주님을 닮아가는 마음의 묵상이 내 삶의 자리 어디쯤에 얼마나 자리하고 있나요?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복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갖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축복의 혁명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 기도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복된 길을 약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필요를 위해서 주를 찾는 이기적 신앙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찾는 제자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의 뜻을 따르기 위해 

갈급한 심령으로 주의 뜻을 구하고 애통해 하면서도

온유한 마음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주께 긍휼을 입은 자답게

긍휼을 베푸는 자로 살게하시고

마음을 나누지 않고 청결하게 지키며

화평케 하는 자로 어떤 상황에도

자기를 부인하고 설 수 있게 하옵시며

박해 속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복있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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