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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03. 2021

누가복음 01:57-66 주님과 함께하는 삶

누가복음 01:57-66

누가복음 01:57-66 주님과 함께하는 삶


주의 긍휼을 입은 엘리사벳, 주를 찬송한 사가랴, 주의 손(능력)이 함께하는 요한. 세례요한의 가정은 이렇듯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사는 이들입니다. 주의 긍휼을 입은 요한과 그의 부모의 삶은 이웃과 친족들에게 기쁨과 기대를 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 57-66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관습이 아니라 새이름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 보배로운 소유

엘리사벳이 요한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들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이 여기심을 듣고서 ‘함께’ 즐거워합니다. 이미 천사를 통해서 요한의 탄생이 이웃들에게 기쁨을 줄 것을 예고한 바 있습니다(1:14). 노산이어서 당사자들만큼 이웃들도 기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것보다 세례요한의 삶이 거룩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많은 이들을 주께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에 기뻐할 것이라 했습니다(1:15-16).

성경이 증거하는 세례요한의 삶은 나이 30도 못되어서 헤롯에 의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나이들어 낳은 자녀를 일찍 잃어버린 부모, 노년에 낳은 아들을 잃어버린 부부를 이웃들이 바라보며,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평생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곧 왜 그를 이 땅에 보내셨는지는 온 몸과 마음으로 알고 살다 간 인물입니다.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함을 받음’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때문입니다. 결국 성령의 능력이 이 모든 일을 가능케하고 기쁨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

“요한이라 할 것이라” (60절)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천사가 알려준대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이미 오랜 시간동안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사가랴는 많은 생각을 해오며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지어준 이의 주권이며, 그 이름을 쓰는 것은 그 주권적 통치에 그대로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생사화복을 주께 의탁하고 노년에 얻은 자녀까지도 기꺼이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오랜 관례와 관습이라는 미명하에 아무 뜻도 모르고 쓰고 사용하고 살아가는 삶을 따르지 아니하고 주님이 함께하시므로 알게 된, 오랜 묵상을 통해서 깨닫게 된 새 길을 따라 지어진 이름을 따라 살아간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이름은 주님의 소유권을 제대로 인정하는지,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는지, 자녀들까지도 주님의 소유권을 따라 주 뜻대로 양육하는지,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는 돌아봅니다. 그래서 늘상 주어진 삶을 끌려가듯 관례와 관습을 따라 생각없이 가고 있지는 않는지 또한 돌아봅니다. 새 해 새 삶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그렇게 새 피조물된 정체성을 따라 주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는 삶이라야 제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

엘리사벳의 오랜 임신 기간동안 닫혔던 사가랴의 입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쓴 후에 열립니다. 이에 사가랴가 한 일은 성령충만함을 받아 예언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조치 이후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하실 때는 이전의 고난도 시련도 연단도 모두 주님 뜻안에 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주를 찬양케 하십니다.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주의 능력이 가능케 합니다. 주의 긍휼을 입은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아이의 이름을 지은 것은 그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의 긍휼하심과 능력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니 주를 기뻐하며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자녀도 주님 것, 우리도 주님의 것이니 지으시고 부르신 뜻을 따라 개인적으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공동체적으로는 말씀과 생명의 공동체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이웃과 함께 기뻐하며, 두루두루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 주의 긍휼과 능력이 함께하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 67-75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성결과 의로 섬기는 삶입니다. - 거룩한 백성

오래도록 예언이 사라졌다고 했는데 드디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가랴를 통해 다시 예언이 시작됩니다(1:67). 성령의 충만함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깨닫게 해줍니다(1:68-74). 더불어 노년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아들 요한이 어떤 사명을 가진 자인지도 알게 됩니다(1:76-80). 

400여년의 암흑기라고 하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시기 전, 마치 새벽이 오기 바로 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엘리사벳의 불임을 통해 이스라엘의 실존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고 언약을 기억하셔서 마침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시면서 먼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이를 보내셨습니다. 이 일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던 사가랴는 오랜 시간 입이 닫히며 깊은 묵상 중에(말을 할 수 없었기에 더 깊이 묵상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게 됩니다. 

사가랴는 지난 10개월 동안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가 마침내 요한이 태어나 그의 이름을 지으며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깨달은 후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어떻게 될지 그의 작명과 사가랴의 일을 보면서 주의 능력이 함께하는 요한이 어찌 될지 생각하지만(의아함?)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러한 사실들을 깨닫고 예언하게 된 것입니다. 

때로 말할 수 없는 시기와 사건들이 있습니다.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요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중첩되고 아무런 계산도 할 수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터널같은 시간들을 살아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것만으로 살아갈 이유와 인내할 수 있는 용기와 소망과 감당할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가랴는 바로 그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언하게 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며 기다리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밖에 없습니다. 주의 말씀들을 묵상하고 읽고 연구하고 나누는 모든 시간들 속에서 말씀충만, 성령충만을 받아 주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성령충만한 사가랴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속량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들(뜻)을 깨닫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고, 구원의 뿔(메시야)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습니다. 이 일은 이미 선지자의 입으로 예언한 것으로 모든 원수에게서와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또한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일 곧 원수와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고 속량하신 뜻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충만은 말씀충만입니다. 말씀충만은 곧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 곧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가랴는 그래서 오래전 다윗에게 했던 약속,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백성을 속량하기 위해 구원의 뿔 곧 메시야를 일으키신 것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은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로 주 앞에서 곧 주님과 함께 더불어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실존과 사명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일평생 주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주님 앞에서 성결, 의,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지와 마찬가지로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를 깨닫는 것은 우리 삶에 많은 부분들을 변혁시킵니다. 

우리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후에 질문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나를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뜻과 같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거룩(성결)’임을 구약은 내내 증거해 왔습니다. 사가랴는 지금 성결과 의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고, 우리의 예배와 거룩한 산 제물되는 삶이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합당한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제의 행위에 국한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언행심사 모든 삶의 전 영역을 통해 성결과 의 곧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합당한 삶, 세상과 구별되고, 세상의 가치와 세계관을 따라 휩쓸려 살아가는 삶이 아닌 구별되고 성별된 거룩한 길로 행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걸어가야 할 새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이 중요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분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길에서 매일의 묵상은 참으로 중요한 도구입니다. 매일 말씀으로 충만한 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일이며 그런 삶이라야 성결과 의로 두려운 없이 섬김 곧 온전한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76-80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에서 사가랴가 아들 요한을 향하여 예언한 내용은 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 그의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알리는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죄사함의 세례를 행할 것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때문이라 고백합니다. 이러한 사가랴의 양육으로 요한은 심령이 강하여서 빈들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엘리사벳의 불임의 태를 여셨고, 하나님의 긍휼이 조상들에게 한 언약을 기억하셨고, 하나님의 긍휼로 주의 백성이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나 됨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빛 되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비추사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가랴가 자녀 요한의 사명을 깨닫고 고백했던 것처럼 오늘 자녀를 향한 생각에서 너무도 많은 부분들을 세상과 타협해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곧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도 알고 자녀들에 대해서도 알고 확신하며 주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의 삶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알고서 그런 삶을 살아갔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삶, 하나님의 뜻 곧 자신을 향한 사명을 따라 살았던 삶,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는 삶, 많은 이들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삶, 주의 백성에게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삶,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 요한이 살았던 삶의 자리를 ‘빈 들’이라고 말합니다. 광야는 우리가 여전히 살아야 할 곳에 대한 총칭입니다. 그곳은 광야학교이며, 광야교회입니다. 그것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되고 살아지고 성숙되며 임마누엘을 경험하고 누리게 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주님과 함께하며 빈 들 곧 광야 그어디도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지금 우리는 보배로운 소유로, 거룩한 백성으로, 그리고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자로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거둠의 기도 

주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주의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 

우리 주님을 온전히 알고, 

주의 뜻을 깨달으며 

우리 자신을 향한 뜻을 온전히 깨달아 

왜 나를 구원하셨는지 깨닫고 

주신 사명을 따라 충성된 종이게 하옵소서. 

우리 뿐 아니라 

맡겨주신 자녀들을 향한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옵시며, 

자녀들도 주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꿈을 꾸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 혼탁한 세대 가운데서 

심령이 강하여서 

빈 들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족함 없이 주만 섬기는 의로운 삶을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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