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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10. 2021

누가복음 04:14-30 은혜의 해를 선포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04:14-30

누가복음 04:14-30 은혜의 해를 선포하신 예수님


광야에서 갈릴리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은혜의 해가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환영이 아니라 의심하고 거부하며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의 실존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 과부, 나병환자, 고향사람들, 회당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 14-15절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치시니 뭇 사람들이 칭송합니다. 

광야에서도 그리고 갈릴리의 여정에서도 여러 회당에서의 가르침의 여정에서도 예수님은 늘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셨습니다. 이에 뭇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칭송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칭송했던 이유는 복음 곧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전통적인 변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여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경험하여 들려지게 하고 실제적이게 한 것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바라보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눈으로 뭇 사람들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하신 많은 이들이 이에 합당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짧게 언급된 긍정적 반응에 대해 ‘뭇 사람들’이라고 한 것은 뒤에 나오는 회당에 있는 이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대조됩니다.  

주님의 가르침 곧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일하신 모든 것에 대해 바르게 듣고 깨달아 그 말씀이 우리를 읽게하고 해석하게 하며 우리를 새롭게 빚게 하는 역사를 간구합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순종입니다. 말로만 반응하고 형식적으로만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말씀에 온몸으로 반응하고 살아내는 자라야 복음에 합당한 자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 자체만으로 영광과 기쁨과 소망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길 원합니다. 


# 16-21절 예수님은 은혜의 해가 이미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라신 나사렛의 회당에서 성경 특별히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읽으시고 약속된 말씀이 성취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첫성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은혜의 해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읽으신 말씀인 이사야 61장에서 약속된 말씀은 메시아가 오시면 자유와 해방과 치유와 회복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 질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설 수도 살 수도 없고, 소망 없는 연약한 인간의 실존을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등의 제유법적 표현으로 은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관계가 파괴된 인간은 모든 것을 잃었고, 마귀의 종노릇하며, 하나님 아닌 것들에 사로잡혀서 자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억눌린 자처럼 스스로 설 수도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 인간은 참된 쉼과 안식과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만끽할 수 있습니다. 당대 로마 치하에 있던 이들은 오랜 세월동안 피지배 민족으로서 이와 같은 억눌립에 대한 자유와 해방의 소식이 바로 가장 좋은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은혜의 해는 희년입니다. 50년마다 시행되어야 했던 제도로서 가난하고, 포로되고, 억눌리고 사로잡히고 제대로 볼 수 없는 이들이 다시금 삶을 회복하게 하는 제도가 희년의 제도입니다. 이 때는 모든 것이 자유케 되고 해방되고 치유되고 회복되어 참 삶을 살게 됩니다. 스스로 살 수 없고, 얻을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회복과 자유 또한 불가능한 것일진대 이러한 모든 것에서 우리를 구원하사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만끽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안식일과 안식년에서 짧게 적용되는 일이 50년째에는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희년이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그곳에 이미 시작되었고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며, 이전에 우리가 섬기며 사로잡혔던 모든 헛된 우상과 거짓된 왕들의 억압과 속박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고 생명을 얻게하고 온전케하는 왕으로 우리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가치관과 세계관이 바뀌는 것으로 이전에 주인 삼은 모든 헛된 것들을 버리고 오직 주만 바라보며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삶이 최고인 것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 22-24절 예수님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증언하시는 은혜로운 말씀을 들은 고향 사람들은 요셉의 아들인 것을 알기에 놀랍게 여깁니다. 그런데 이 놀라벡 여김은 결국 이상하게 여긴다는 의미이고 이어서 그들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이적들을 자신들의 눈앞에서 증명해 보이라고까지 요구하며 예수님을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다만 그의 신분과 가족과 사역에 대해서 소문으로 듣고 눈으로 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적부터 예수님이 자라신 것을 본 이들은 익숙한 그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대로 알지도 모르고, 알지 못하니 믿지도 못하고, 믿지 못하니 눈으로 보고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놀라운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예수님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되심과 복음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해 알고 영접해야 하며 그것이 실제 삶에 반영되고 수용되고 역사되고 변화가 일어나서 온 몸으로 알아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으로,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온전히 영접하고 회개하며 주님의 통치와 인도에 온 몸으로 온전히 순종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여기까지 나아가지 못했고, 다른 유대인들도 결국 구주 에수님에 대해 바르게 알지도 못하니 그에 합당한 반응도 없습니다

익숙함과 습관들이 노련함을 가질 수 있는 장점도 있으나 자칫 늘상 내가 알고 보는것만 보다가 한편으로 기울거나 왜곡되거나 고착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늘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도 그렇고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고 정규적인 예배에 참석하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그렇게 종교적 행위들에 대해 익숙하게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성도로서 본분을 잘 감당하면서 하나님을 잘 알고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그러한 신앙이 삶의 선택과 방향과 내용에는 아무런 고려대상도 안되고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익숙한 습관을 따라 하나님 아닌 주권의 결정과 선택을 따라 일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일 말씀 앞에 서는 이유는 익숙한 우리의 삶을 늘 낯설게 보기 위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새 굳어버리고 왜곡되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부분들을 진단하고 발견하고 교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새롭게 되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앞에 낯설게 서는 일들, 그래서 주님을 알아가는 일들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 25-30절 복음에 합당하게 반응하여 은혜를 누리는 자들은 극히 적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조롱과 불신에 대한 반응에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흉년에서 사렙다 한 과부만 은혜를 입었고, 나병환자 중에서 수리아 사람 나아만만 나음을 입었다는 사례를 언급하십니다. 회당에서 이를 들었던 자들이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낭떠러지로 끌고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거침없이 지나가십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이방인인 사렙다 한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은 합당한 반응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의 백성됨 곧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아마도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에 대해 수용 불가하며,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불순종과 거역에 반하여 이방인들의 긍정적이며 합당한 반응에 대하여 급기야는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무관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폭력적으로 죽이려고까지 나아가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이 위기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길을 가시는 신비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은혜의 해와 복음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 요구됩니다. 회당에 있던 자들이 화를 냈던 이유는 우선 고향사람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언급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이유는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을 특별히 선택받아 누린다고 생각했던 것을 예수님께서 그렇지 않다고 교정하는 것에 대한 분노로 보입니다. 선민사상과 특권에 자존심을 입고 오래도록 포로되고 지배당해온 이들로서 자신들을 억압하고 지배하고 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고하고 정작 자신들은 거기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것을 들었을때 눈이 뒤집힌 것으로 보입니다. 명백하게 잘못 알고 있는 신념이 결국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가르침에 대해서도 제대로 듣고 깨닫지 못하고 무지한 신념이 스스로를 얽어매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한 것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 삶의 자리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읽어내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님 손에 의탁한다면 우리 삶의 중심과 내용 그리고 방향은 주님을 향해 민감한 영적 감각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신을 만들어 두고서 정작 진리되신 예수님은 배척하며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 거둠의 기도

성령의 능력으로 살게하옵소서

주의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게 하옵소서. 

주의 은혜의 해를 온전히 누리게 하옵소서.

채움과, 자유, 해방과 온전한 앎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익숙함에 매몰되지 않고

늘 낯설게 주님앞에 서서

말씀으로 빚어지게 하옵소서. 

주의 통치와 인도에 합당하게 반응하며

바른 앎과 지식과 신앙으로 살도록

성령의 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을

충만하게 허락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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