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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13. 2021

누가복음 05:12-26 소외된 자들을 회복시키시는 예

누가복음 05:12-26

누가복음 05:12-26 소외된 자들을 회복시키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온 몸에 나병이 들린 이를 깨끗하게 치유하시며 정결규례를 따라 공동체로 회복시키시니 수많은 무리가 몰려오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기를 쉬지 않습니다.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서 병고치는 능력 행하는 곳에 있을 때에 네 명의 친구가 침상째 데리고 온 중풍병자를 치료하며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보니 놀라며 두려워하는 이도 있고 신성모독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 12-16절 예수님은 우리가 깨끗함 가운데 살도록 해 주신 분입니다. 

온 몸에 나병 들린 이가 예수님께 부복하며 깨끗함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를 깨끗이 치유해 주십니다. 이어 경고하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규례를 따라 깨끗함을 입은 것을 입증하라 합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저 많은 무리들이 모여 옵니다. 예수님은 그런 중에도 변함없이 한적한 곳에서의 기도의 시간을 거르지 않습니다. 

온 몸에 나병에 들린 이의 모습 역시 이스라엘과 인간의 실존을 보여줍니다. 제일 먼저 고통입니다. 병들어 있고 살이 썩어 가고 있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으나 가족과 공동체에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외된 상태로 외로움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분명 병들어 있는데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병세는 악화되고 그로 말미암아 관계들이 파괴되고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소망 없이 외로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접촉도 대면도 만남도 소통도 불가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며 외로움의 고통을 위로하시고 정결 규례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공동체로의 복귀가 가능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온 몸이 나병들려서 온통 소외된 이가 온전히 회복되어 온 삶이 온전케 된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가 나병이 아니라 깨끗함 가운데 살기 원하십니다. 거룩함 가운데 살기 원하십니다. 그 길만이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지속하며 온전함 가운데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거룩한 삶의 길을 지속하기 위해서 한적한 곳에서의 기도 곧 하나님과의 대면과 소통의 시간들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분주함 속에서도 많은 이들의 요청 속에서도 산재한 업무속에서도 긴급한 요구들 속에서도 우선순위를 번복하거나 놓치지 않습니다. 그런 시간이 예수님께서 거룩한 길로 행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사명에 충성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의 대면의 시간 곧 묵상의 시간은 우리로 거룩한 삶의 길로 행할 수 있게 하는 지혜와 능력을 덧입는 시간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얻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떤 삶의 환경 속에서도 묵상의 시간들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어느날 부터는 그 시간이 우리를 지켜 준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삶의 우선순위에 우리 주님이 계시고, 주님과의 대화와 소통의 시간인 묵상의 시간이 여전히 자리하길 빕니다. 그런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닌 함께이고, 우리의 모든 소외를 끝내고 거룩한 길로 온전히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줄 믿습니다.  


# 17-26절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에 병고침과 능력이 함께합니다. 그런 자리에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중풍병자를 네 명의 친구들이 지붕으로 올라가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립니다. 많은 무리가 있어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사함을 받으라 선언하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외에 죄사함의 권세가 없기에 신성모독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읽고 죄사함과 치유 중에 말로 하는 죄사함이 쉬워보이지만 인자가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것을 알게 하기 위해 선언한 것이라 하시고, 이어서 병자도 치유하십니다. 이에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 놀라는 사람 두려워하는 사람 그냥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는 사람들로 나뉩니다. 

좋은 친구는 기쁠 때나 슬플때나 좋을 때나 힘들 때 늘 함께하는 이들입니다.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이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 곧 그들의 삶과 관계를 주님은 좋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먼저 사해 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믿음이 치유하느냐 주님이 치유하느냐, 당사자의 믿음이냐, 친구들의 믿음이냐의 논쟁보다 우리 삶의 기본 자세와 태도를 더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깨끗하게 살기 원하기고 행복하게 살기 원하십니다. 광야같은 세상 속에서 더불어 함께 살라하신대로 우린 그렇게 서로 도우며 세우며 협력하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처음 지으셨고,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신 주님의 마음인 줄 믿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데 걸림이 되는 모든 것들을 함축적으로 죄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음, 미움, 시기, 질투, 욕심, 원망, 불평, 투기, 악독함…. 이 죄가 사람사이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두 파괴하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이러한 죄에서 주님은 우리 대신 죄값을 치루시고 다시 그렇게 살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거듭난 우리가 지금 살아야 할 삶의 자세와 태도와 내용들은 거룩함 곧 정결한 삶입니다. 그런 우리의 삶의 언행심사에 부정한 것들이 여전히 움트고 열매로 드러난다면 우리의 근본적인 자세와 뿌리가 어디에 붙어있고 무엇을 지향하며 채우고 묵상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 외에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결규례를 통해서 이러한 죄를 사하는 통로를 열어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사함에 대한 선언에 대해서 종교지도자들은 이것을 빌미로 예수님께서 신성모독한다고 말합니다. 죄사함은 하나님 외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사함의 통로를 정결예식을 통해서 열어 두셨습니다. 이는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죄를 방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해서 사람 사이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하고 지속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이 규례로 오히려 메시아를 정죄하고 사람들이 회복되는 길을 막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결규례의 본질 곧 정신을 잃어버리고 전통과 규례와 형식만 강조하다가 결국 사람을 살리고 회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형식도 법도 규례도 예식도 모두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정신과 제정 의도가 더 중요합니다. 그것을 잃으면 나머지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것이 오히려 원 의도와 반대로 사람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얽매이게 해서 자유와 해방을 방해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막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아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분노하신 것중에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아서는 것이라 한 것도 결국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행하는 제의 행위들과 삶 그리고 사상들과 신학과 지식이 혹여 이렇게 사람들이 주님앞에 나아오는 것과 세상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을 제약하고 제한하고 제재하기까지 하는 우를 범하고 있진 않나요? 우리가 진정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 조직인지 신앙인지? 우리 신앙의 대상이 맘몬인지 하나님이신지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진단할 수도 바꿀수도 없다면 우리도 어느새 예수님 당시의 책망받는 종교지도자들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

죄사함의 권세를 행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을 본 무리들의 반응이 제각각입니다. 치유받은 중풍병자도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렇게 즐거이 귀가한 이도 있지만 또한 심히 두려워하는 이도 있습니다. 목도한 사실을 두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도 합니다. 

삶은 경이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모든 순간이 경이로 가득찬다면 우리는 미처 그 일을 다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매순간 순간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경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경이와 기적들은 모두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한다고 더 주시고 그렇지 않는다고 덜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시간 속에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런 경이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으로는 우리 삶의 여정이 이 경이로운 은혜를 베푸신 그 뜻에 따라 거룩한 삶, 깨끗한 삶으로 열매맺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하고 단순하고 간단한 말이지만 정작 잊을 때가 더 많은 듯 합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끌려가듯 살아가다가 길이 막히고 어려울 때만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해볼 것 다 해보고 난 후에야 다시 눈을 하늘로 들어 하늘을 향해 구하는 일이 많은 듯 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가장 먼저 고려하고 목도하고 구하는 대상의 우선순위에 우리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열어주신 이 경이로운 날과 시간들과 삶과 모든 환경 속에서 우리로 거룩하게 살게 하신 주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매 순간을 주님께 영광이 되도록 주님의 뜻을 따라 살리고 섬기고 세우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길 간절히 원합니다. 


# 거둠의 기도

소외된 우리를 온전히 회복하사

다시금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한적한 곳에서의 묵상의 여정을

멈춤과 거름 없이 지속할 수 있길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좋은 열매 맺길 원합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입은 우리가

다시금 그 죄로 사람 사이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경이로운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주어진 삶의 자리를 성실하게

사랑으로 채워가길 원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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