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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26. 2021

누가복음 09:01-17 하나님나라를 선포해 가시는 예

누가복음 09:01-17  

누가복음 09:01-17 하나님나라를 선포해 가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모아 축귀와 치유의 능력과 권위를 주시며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고 사람들을 치유하러 보내시며 자족하며 사역하라 파송합니다. 제자들의 전도로 전파되는 복음을 접한 헤롯은 두려워하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예수를 만나보고자 합니다. 돌아온 사도들을 데리시고 벳세다에 이르렀으나 많은 무리가 따라와 때가 이르자 예수님은 이들 남자만 오천명 되는 모두를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고 남은 조각만 열두 바구니였습니다. 

본문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신 예수님이 함께하시며 통치하시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보여주면서, 그리고 그런 예수님에 대한 반응 곧 따르는 제자와 두려워하는 분봉왕 헤롯과 고침을 받기 위해 오는 무리에 따라 누림의 차이가 있음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 1-6절 하나님나라는 영접하는 자가 그 능력과 권능을 덧입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께서 복음 되심의 가르침과 사역들 듣고 배운 제자들은 이제 받은 그 복음의 통로로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축귀와 치유의 능력과 권위를 위임하시며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특별히 자신들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족함 가운데서 사역하기를 명하셨고, 영접하지 않는 이들은 그 책임이 그들에게 있음을 증거로 삼으라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복음은 메시아의 도래 곧 왕의 강림이십니다. 이를 하나님나라의 임함으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복음의 능력이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보지 못하는 자, 듣지 못하는 자, 귀신 들린 자, 사로잡힌 자, 앓는 자, 소외된 자들에게 치유와 회복과 축귀등을 통해 증명됨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왕이 오셨을 때에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가치관과 세계관이 바뀌고 새로운 세상의 새 왕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런 왕의 통치하에서 모든 거짓된 것들이 드러나고 자비의 통치아래 있는 이들은 참된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 전파 사역의 여정에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자족하며 거하고 가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복음 전파의 여정에 다른 부분이 걸림이 되거나 변질 내지 왜곡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 우선 이유로 보입니다. 또한 복음 전파의 대가로 대접을 기대하지 않게 하기 위한 의도도 보입니다. 복음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 곧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가감없이 전파해야 합니다. 이에 다른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빌미로 이득을 취하거나 대접을 받거나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행위가 되며, 결국 자고하거나 교만해져서 넘어지기 쉽습니다. 오늘 사역자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우리 주님을 따르고 그 능력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이러한 유혹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으면 나오면서 그 발에 흙을 떨어벌라 합니다. 그들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복음 곧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이 함께 하심로 얻는 것들을 경험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모습과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메시지들을 민감하게 잘 감지하고 분별하며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 주위에 붙여진 이들은 모두 주님이 보내주신 메신저들입니다. 듣든지 섬기든지 영접하든지 도와주어야 하든지 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부지중 환대로 천사를 대접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중동지역에 사는이들에게는 마을과 집에 오는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 명예를 지키는 문화라 합니다. 말씀 사역자에 대한 환대로 국한하지 말고 적어도 우리에게 오는 모든 이들이 주님이 붙여주신 이들로 믿고 성심성의껏 환대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인 줄 믿습니다. 그 과정에는 거절할 만한 이유와 계산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있는대로 섬김을 다한다면 이후의 열매는 주님의 주권하에 진행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게 찾아오는 이들을 향한 환대를 기억하고, 그 것이 천국을 누리는 길이요, 더불어 천국의 전차에 동역하는 일이 되는줄 믿습니다.  


# 7--9절 하나님나라는 거짓 왕과 죄인은 당황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역사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복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분봉왕 헤롯은 당황합니다. 이전에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 또는 엘리야나 다른 선지자가 다시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을 들어서 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보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바람직한 이유보다는 혹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데 수단으로 삼을 수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도 숨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분봉왕 헤롯이 왕이 된 것에 대한 정통성은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항상 자신의 지위에 대해 확고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폭정을 통해 힘을 과시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례 요한을 참수하여 죽이는 패역함을 저지릅니다. 이렇게 스스로 권위를 세우려 하나 인정할 수 없는 권좌에 있다보니 진자 왕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그를 당황하게하고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가짜 왕은 진짜 왕을 알아볼 수 있었을 터인데, 자신의 지식과 관점과 이해타산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불의한 나라의 가짜 왕은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데에는 그의 욕망과 두려움을 신앙의 힘을 통해 이루고 유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고자 종교적 권력을 이용하고, 종교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권력과 결탁하는 정교유착은 정경유착과 병행해서 진행됩니다. 정치과 경제와 종교는 사실 분리할 수 없이 공존합니다. 정치는 누가 왕이냐의 싸움이고, 경제는 맘몬의 힘과 정의 그리고 그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종교는 최고의 가르침과 진리로서 인간다움의 삶을 제대로 살게 하는 것과 공평과 정의의 실현 등이 그 존재의 목적 중에 하나입니다. 이 세 가지가 분리되어 건강하게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분야의 본질과 목적을 잘 이해하고 상호 견제와 협력 속에서 이 모든 주권이 한 두 사람에게 국한되어 휘둘리지 않도록 해야하며, 서로를 존중하되 사람 위에 있어서도 안되고, 하늘의 뜻을 거역해서도 안됩니다. 만일 역천하고, 독재하고 독점하고 독립한다면 반드시 병들고 왜곡되어 변질되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군림하고, 억압하고 급기야 죽이게 됩니다. 정치의 혜택에서 소외되고, 경제적 주권을 잃어버리고, 종교의 가치에서 벗어난 사회는 독재하게 되고, 자본이 최고의 권력을 가진 주인이 되고, 사이비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왕이심을 아는 정치, 모든 만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경제, 우리 신앙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바르게 아는 신앙이 건강한 사회와 삶과 신앙으로 가는 기초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을 찾고 구하고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게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하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아닌지요? 모든 거짓된 욕망을 버리고 온전히 주의 주 되심과, 나의 모든 소유의 주권이 주께 있음과,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든 삶의 목적과 방향과 이유를 주께 두는 신앙을 바르게 갖고 살아가기 위해서 날마다 주님 앞에, 주님의 말씀의 통치와 인도를 따라 살기 원합니다. 


# 10-17절 하나님나라는 우리 모두를 풍성하게 먹이고도 남음이 있는 나라입니다. 

사도들이 돌아와 행한 일을 보고할 때 예수님은 이들이 자고해지지 않도록 따로 벳새다로 떠납니다. 하지만 무리들이 알고 따라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영접하여 하나님나라의 일을 가르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저녁이 되니 제자들이 무리의 식사를 위해 마을로 보내길 요청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병이어밖에 없어서 참자만 오천명이나 되는 이들을 먹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오십명씩 앉히고 오병이어를 축사하고 제자들에게 떼어 주어 무리를 먹이십니다. 그렇게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입니다. 

우선 오병이어의 기적적인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인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그 자체가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해하는 것보다도 이 사건을 통해 증거하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어떤 능력을 가진 분이신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메시아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억눌린 자들을 회복하고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무엇을 마실까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않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이미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간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와 같은 역사들을 경험했고, 제자들은 전도여정에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공급하심과 일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가짜 왕은 자신의 입지가 좁혀지고 있기에 당황하고 불안해하고 급기야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자신을 따라온 무리들을 제자들이 먹을 것을 주라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먹을 거리를 말합니다. 당연히 제자들은 실제 먹을 거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있는 자연 먹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먹이라고 하는 이유는 제자들과 무리들이 먹어야 할 양식이 육신적인 먹거리도 있지만 말씀의 빵이 되는 예수님 곧 하나님나라의 복음 되시는 주님이 그들의 주린 영혼을 배부르게 수 있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이 떡이 되게 하는 능력도 이미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 그런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축사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라 하시면서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채움을 누려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풍성함을 이렇게 눈으로 몸으로 목도하고 경험케 하심을 통해서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이 떡을 먹으며 사람이 떡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알아야 했고, 흑암과 죄악에 살아가는 인간, 소외되고 주린 인간들도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어 영생을 살게 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우리 영혼을 먹이시고 회복하시고 살리시는 우리 주님이 왕되신 나라가 하나님나라입니다. 지금 이 광야에는 풍성한 하나님나라의 만찬이 진행되고 있고, 그런 풍성한 양식은 하나님의 백성(12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충분히 먹이고 구원하고 살리고도 남음이 있을정도라고 하는 것을 남은 열두 바구니를 통해서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축사 후에 나누는 것을 보시고 자신의 소유를 나눔으로 음식이 남았다는 식으로 이 사건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오병이어의 기적 자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며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된 이들이 변화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결국 이 사건들을 통해 지금 계속적으로 사람들의 변화와 반응보다는 예수님께서 누구인지에 대한 부분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가져오는 역사들을 증거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주님을 더 알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앞선 거짓된 왕 헤롯과 대조되고, 이 사건 뒤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 즉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증거들은 누가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 곧 하나님나라의 복음 되심을 증거하기 위한 의도가 더 타당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사건 통해서 우리도 주님을 단순히 헤롯처럼 우리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그리고 조금 특별한 가르침과 이적을 일으키는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며 신앙하고 있진 않는지요. 그래서 신앙과 별개로 우리의 삶의 생사화복은 여전히 주님 아닌 다른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무지함 가운데 주님을 따르고 증거하고 믿고 있다고 하는 건 아닌지 돌아봅니다. 주님이 성찬을 통해 계속 기념하라 한 것이 바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상기하며 살라 하신 뜻이 아닐까요? 실제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식사하며,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주님이 떼어주시는 먹거리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보는 이야기들이 이러한 해석을 지지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_오천 명의 식사(9:10-17)는 부활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사(24:36-43), 엠마오의 식사(24 : 13-32, 33-35)와 비슷하다. 세 식사는 민초의 음식을 나누는 일상의 공동 식사다. 모두 계시(24:26-27, 44-46; 9:18-27)와 연결되고, 계시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24:26, 46; 9:22) 이 포함된다._<묵상과 설교>에서 발췌) 

주님으로 족합니다. 주님이면 됩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를 고백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고백할 뿐 아니라 그렇게 믿는대로 살아갈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 주님을 따르는 제자요 거룩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 거둠의 기도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주님

고통받는 영혼에게

치유와 해방과 온전케 하심을 허락해 주옵소서. 

헛된 욕망에 눈멀어

우리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워 주옵소서. 

우리 주님이면 족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갈 믿음 주옵소서. 

매일 주님과 동행하면서

풍성한 천국잔치를 누리며 살고

넉넉하게 나누며 

주님의 나라 증인으로 살게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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