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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28. 2021

누가복음 09:28-36 하나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누가복음 09:28-36 

누가복음 09:28-36 하나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라 고백한 것을 들으신 후, 첫 수난의 예고에 이어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로부터 팔일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가셔서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고,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다시한번 별세에 대한 예고를 듣습니다. 졸다가 이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는 초맛 셋을 짓자고 합니다. 그 때에 구름이 덮인 속에서 다시한번 소리가 나서 예수님을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로 그의 말을 들으라 합니다. 이후 예수님만 보이고 제자들은 잠잠하여 이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합니다. 


# 28-31절 기도는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예수님은 수시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번에도 세 제자를 따로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십니다. 이번에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옷도 희어져 광채가 납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합니다. 

*

8일 전에 예수님은 수난 예고와 더불어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길을 제대로 가기 위해서 예수님은 쉬지 않고 기도하신 모범을 보이십니다. 친히 기도를 통해 스스로 자기 부인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자기부인의 길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겟세마네의 기도가 바로 자기 부인의 절정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기 부인의 길을 가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모범을 몸소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시니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납니다. 

기도는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고 바꿔서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고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도는 이방인들과 우상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방식입니다.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묻고 마침내 그 뜻을 듣고 깨달은 후에는 그 말씀으로 자신을 쳐 복종시켜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변화되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제대로 하는 이들, 오래 기도하는 이들은 점점 주님의 말씀으로 빚어져 주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온유와 겸손으로 옷입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이방인들이나 우상에게 하는 것처럼 오래 기도하는 이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하나님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이 기도의 능력이라 여기면서 자신은 변화되지 않기에 어느새 목이 곧고 교만한 사람 굳은 사람이 됩니다. 기도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시간, 자기 부인의 시간임을 명심하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빚어가는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 함께 말하는 중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합니다. 

모세는 출애굽과 율법으로 상징되는 옛 언약의 대리자이며 새 언약의 중재자를 예언한 인물입니다(신18:15). 엘리야는 새 언약을 성취할 메시아를 맞이할 것으로 예언된 선지자였습니다(말 3:1; 4:5)._<묵상과 설교> 발췌. 율법과 선지자로 대표되는 이 두 사람은 결국 구약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결국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말한 그 메시아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별세’(신약에는 엑소도스가 세 번 언급됩니다. 히브리서 11:22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떠나는 것을 언급합니다. 본문과 베드로후서 1:15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중의적인 의미를 내포한 단어입니다)에 대한 언급을 이 두 사람이 했다는 것은 우선 유대인들이 대망한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가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아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별세(죽음)는 곧 죽으심의 희생을 통해 새 출애굽 이루시고, 새 언약을 완성하실 분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결국 이 두 사람(모세와 엘리야)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따라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들입니다. 동시에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셔야 했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사 새 출애굽을 완성하시고 그렇게 낸 새롭고 산 길을 통해 우리로 하나님나라를 사는 선(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한 일을 열심히 하는 새 백성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또한 상고합니다. 그렇게 깨달은 뜻에 따라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뜻 곧 말씀의 통치와 인도를 따라 이 광야 여정을 살아가는 것이 새 출애굽한 새 백성에게 합당한 모습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빚고, 온전한 순종으로 거룩한 산 제물되어 선한 일에 열심인 새 백성으로 살기 원합니다.


# 32-33절 기도는 온전히 깨어 중언부언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서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세 분을 위해 초막 셋을 여기에 짓자고 말하는데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한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졸았다고 하는 일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후에 감람산에서까지도 졸았던 것을 보면(22:39-46), 주님을 따르는 일이 힘들든지, 아직도 기도하는 것을 제대로 못배운 것이든지,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볼 수 있고, 그래서 아직 제자들이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제자의 길, 자기 부인의 길, 곧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길을 제대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주님이 가신 좁은 길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 곧 사망의 길로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따라 휩쓸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

베드로가 제안한 초막 셋은 우선 출애굽한 후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은 성막에 영광이 가득한 것을 기억하고 그렇게 성막을 짓자고 한 것일 수 있는데, 이는 초막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라고 하는 점에서 인정되기 어렵습니다. 유력한 주장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 여정에서 살았던 일들을 기념하는 초막절 기념을 위해 지은 초막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들을 위한 초막이 없다는데 맹점이 있는데 그래도 이 의도가 더 타당해 보입니다. 

결국 초막에 대한 언급은 결국 출애굽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때 누가는 예수님께서 새출애굽을 완성하사 새 백성을 세우실 분임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어서 바로 베드로가 졸다가 온전히 깨서 한 말인데도, 자기가 한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한다고 부정적으로 언급된 표현으로 봐서는 앞선 의도외에 아직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그래서 아직 제자로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어서 구름 가운데 들린 음성을 통해 제자들의 부족한 생각들을 교정해 주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된 신념으로 가득하고, 어리석은 이들이 멀쩡하게 눈을 뜨고도 중언부언하고 횡설수설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말씀을 맡은 이들의 설교에서도, 그리고 오래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이들의 대화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정체성은 결국 우리의 말에 담겨 있고, 그 말은 마음에 품은 생각들과 지식들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신앙과 신학과 사상과 삶이라면 우리 신앙이 지금 중언부언하고 횡설수설하면서 우리가 하는 언행심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앎에 대해 자신할 수 없기에 더더욱 겸손히 진리의 말씀앞에 귀 기울이고 날마다 그 말씀으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기 위해 자기 부인의 겸손으로 나아갑니다. 

*

참고로 방언으로 기도한 이들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말을 한다고 해서 이러한 구절들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인용으로 보입니다. 우선 베드로의 이 발언은 기도 중이 아니라 온전히 깨어서 한 말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행해진 방언은 난 곳 방언 곧 여러 나라의 언어로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었습니다. 이 방언을 통해 목적하는 바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온 열방의 구주이심을 증명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의 신접한 자들이 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하는 것을 방언이라고 훈련하고 연습시켜서 하는 것은 인격적인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백마디 하는 것보다 알아듣는 말로 한 마디 하는 기도가 더 낫다는 바울의 가르침에도 어긋납니다. 결국 그렇게 기도하다가 앞서 말한대로 자기 부인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를 하기에 목이 곧은 자들이 되는 것 같습니다. 

*

영광중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는 사이 아직 제자들은 그런 주님을 비록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했으나 온전한 앎과 깨달음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언급 역시 제자들이 구약의 말씀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과 광야여정과 초막과 성막의 영광에 대한 기억은 있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고, 초막절 절기를 지키는 중요한 기억과 깨달음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궁극적 이해에 있어서도 제자들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졸음과 더불어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한다는 표현을 변화산 사건에 삽입하는 이유로 보입니다. 이어진 구름 가운데 다시 들린 음성이 예수님의 세례시에 선포된 표현이 반복되는 것을 누가가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계속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정체성(하나님나라의 복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그리스도)과 제자들이 가야 할 사명의 길을 가르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 34-36절 기도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구름이 와서 덮이니 모두 두려워합니다. 이 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며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데 소리가 그칠 때 예수님만 보입니다. 제자들은 잠잠하여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못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가시적 표현이 구름입니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에도, 그리고 하나님을 대면한 많은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구름은 항상 하나님이 함께하심가 임재하심의 영광을 표현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 거룩한 하나님의 신비와 임재 앞에 죄인된 인간이 보이는 가장 첫번째 반응은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서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구름 가운데 임재하시며 선포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선포된 소리(3:21-22)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동일하게 가지신 분이시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위해 보냄을 받으신 분 곧 메시아이시며, 그렇게 기름부으심을 받은 분(그리스도)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가깝게는 자기 부인 통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것이며. 더 넓게는 예수님의 통치와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확증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보다 고난받는 종으로서 예수님에 대해 아직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하는 음성에도 잠잠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이르지 못합니다. 오랜 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와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온전히 깨닫고 난 후에야 목숨이 다하기 까지  이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을 영접하고 구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아직 주님을 다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앎은 아는 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된 앎이라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며,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따라 온전히 살아가기를 흔들림없이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이라 합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님께서 가신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말합니다. 오늘을 살아감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 길 위에 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주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일 뿐입니다. 두려움과 염려도 여전히 존재하고, 아직도 부인하지 못한 부분도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갈등하게 합니다. 주님이 새롭게 하심은 이러한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갈등과 도전에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살아갈 힘과 능력을 공급하사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온전히 걷는 자로 살게 하십니다. 오늘도 말하기 전에 먼저 듣겠습니다. 중언부언하고 횡설수설하지 않기 위해 바른 앎을 위해 귀기울이겠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안은 거룩한 성전 곧 성령이 내주하는 성전으로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 외에 이 길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방편이 없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 거둠의 기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택함 받은 이로서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주님을 따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기 원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의 길을 걷는 자로 살기 위해서

또한 기도하는 사람이기 원합니다. 

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그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기 원합니다. 

기도 외에는 

그 길을 온전히 걸을 수 없음을 알고

주의 말씀을 잘 듣고 묵상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주의 뒤 따르는

기도의 사람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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