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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29. 2021

누가복음 09:37-50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예수님

누가복음 09:37-50  

누가복음 09:37-50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예수님


변화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은 믿음없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외아들을 고쳐주시고, 다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믿음이 부족하고,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누가 크냐 변론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예수님은 누가 큰 자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더불어 주의 이름으로 축귀하는 이를 배제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모두 변화산에 함께 오른  세 제자와 산아래 있는 제자들은 모두 같은 상태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깨달음이 부족하고 헛된 변론과 야망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은 그들 뿐 아니라 유대인을 넘어 모든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계속 위엄있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 37-43a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올때 한 사람이 귀신들린 자신의 외아들을 제자들이 축귀하지 못한 것을 고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고 패역함을 한탄하시고, 외아들을 불러 축귀하여 낫게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보내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랍니다. 

9:1-6에서 제자들은 축귀와 병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받아 두루 많은 역사를 행하고 경험했습니다. 이에 헤롯왕도 놀랐다는 소문도 들었고, 오병이어 사건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 중에 어쩌면 제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예수님이시라면 장차 이뤄질 나라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높여질 것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잘못된 메시아 상에 대한 기대를 고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계속 수난에 대한 예고과 십자가의 길을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변화산에 다녀오신 이후 마침내 제자들의 상태가 심각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전에 행하던 축귀를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것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제자들이 그 능력과 귄위를 받았음에도 축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가 제자들의 상태와 태도에 있음을 말합니다. 

믿음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기반으로 합니다. 제자들이 기대하고 고백한 그리스도는 결국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메시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고난받은 종으로서의 메시아 상으로 교정해 주시기 위해서 언급하시고 설명하시지만 다른 역사들은 수용하면서도 이 말씀만은 뒷등으로 듣고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들만 고수하게 됩니다. 축귀의 능력이 자신들이 아닌 예수님께 있음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번의 경험들이 오히려 능력이 자신들에게 있는냥 착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패역한 세대라 함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도 볼 수 있고,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그들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없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귀신을 향한 분노를 비롯하여 진정으로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책망받던 모습입니다(예 신 32:5, 20; 눅 7:31; 11:29-32, 49-50; 17:25).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상태로 인해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진단하시고 온전한 믿음과 긍휼 곧 하나님의 위엄으로 아이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축귀하여 아버지에게 돌려보냅니다(사회적 관계의 회복까지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행하심). 예수님의 신실하신 믿음과 긍휼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많은 이적과 기사를 경험하고 성경을 아는 지식과 연륜이 많다 하더라도 온전한 믿음이 없다면 언제고 우리 삶에 질서와 관계들을 파괴되고 흐트려집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오는 충격에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주님에 대한 바른 앎에 기초한 믿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님을 통해 온전히 알고 얻는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주의 뜻을 따라 행할 때에라야 믿음이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고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무리 믿음의 관심과 방향과 목적과 내용에 대한 상태를 계속 점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나의 믿음을 비춰봅니다. 믿음 없고 패역한 제자의 모습을 보거든 주님의 위엄을 의지하여 고쳐지고 회복되길 원합니다. 


# 43b-45절 예수님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며 경이로운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다시한번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귀담아 들을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묻기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위엄을 통한 역사가 일어날 때 바라보고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것이고, 그런 일을 행하신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기만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면서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오해의 여지를 바로잡아 주시려 합니다. 지금 제자들이 알아야 하고 당면한 문제는 주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고난받는 메시아의 길을 가기 위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서 팔려 가실 때 자신들이 어느 편에 서 있어야 할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기대에 부풀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더불어 제자들이 묻기도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교정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지금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신앙하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선한 뜻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세상의 자랑을 따라 세워진 목적과 뜻이라면 우리는 아무리 말씀앞에 서고 예배하고 주님을 대면하더라도 우리가 보고싶은 부분만 우상처럼 만들어 신앙하는 종교인일 뿐입니다. 매일 묻고 또 그 말씀이 그런가 하고 상고해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계속 점검해야 합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반듯한 길을 가더라도 수시로 전후좌우를 살피고 계기판의 속도와 오일의 양과 엔진의 온도와 실내의 공기와 상태들을 점검하고 졸음이 오는지, 동승자들은 편안한지 그리고 네비게이션을 따라 제대로 가고 있는지 부지런히 살펴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이와 마차가지로 우리 신앙의 여정도 부지런히 살피고 묻고 돌아보며 점검하면서 고치고 교정하고 붙잡고 그렇게 가야 합니다. 이를 회피하고 두려워한다면 금새 우리는 곁길로 새거나 엉뚱한 길로 빠져 헤맬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이 있고 살아 있다면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이 여정에는 길 가, 가시밭, 돌짝밭같은 많은 유혹과 미혹과 위험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온전히 행하기 위해 길되신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야만 합니다. 그러니 회피하지 말고 두렵고 떨리더라도 묻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고치고 교정하고 온전케 됨을 믿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46-48절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큰 자이십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주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제자들이 변론하는 것은 누가 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하나 데려다 자기 곁에 세우시면서 주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고,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가르치시고, 결국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하는 상황인데 아직 제자들은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함을 넘어서 잘못된 기대에 부풀어 급기야 노상에서 헛된 권력욕을 드러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워질 메시아 왕국에서 모두 어떤 자리에 앉게 될지에 대한 것을 염두하고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한 변론을 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당대 가장 작은 자로 여겨지던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면서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제자들이 생각하는 개념을 바꿔주시는 교훈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어린아이 곧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대 받는 이들을 향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이들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을 향한 믿음의 상태를 재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연약한 자들을 향한 섬김과 겸손 그리고 자기 부인의 길이 주님이 찾고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합당한 자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는 것은 당대 문화적 배경에서 같이 밥을 먹고 함께하는 이들이 누구냐에 따라 명예와 지위가 결정되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이 결국 하나님의 위엄을 가졌고, 그런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낮은 그가 가장 큰 자라 하신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우회적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연약한 이들에 대한 태도가 사람과 사회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러한 이들이 차별과 천대 받지 않고 살게 하는 나라입니다. 결국 그 나라에 합당한 우리 삶의 모습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연약한 자들에 대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자고하고, 더 많이 가져 부유해 지려하고, 더 높이 올라가서 군림하고, 남을 짓밟고 그 위에 서서 차별하려하고, 그것을 이룬 이들을 시기하고, 낮은 곳에 있으면서 더 높은 곳을 지향하며 자족하지 못하는 것들 모두 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주님을 믿어서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하는 나라가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는 분명 오늘 교회가 지향하는 나라와 상당한 온도차가 느껴집니다. 주님이 그토록 경계한 맘몬과 이기와 힘과 폭력이 주인되는 그런 나라를 지향하면서 겉만 번지르하게 거룩을 운운하는 이상한 나라에서 갈바를 알지 못해 혼돈속에 있진 않은지요? 탐욕으로 점철된 나라를 천국이라는 상품으로 포장하고 온갖 상술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말을 설교라 하고, 복을 하나님이 아니라 번영과 성공이라고 가르치며 헌신과 헌금 갈취하면서 팔고 있는 종교 장사꾼은 아닌지요? 그런 속에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만큼 서 있으며 그런 이들과 얼마나 다른지 아님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 앞의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오늘 주변의 비난 받는 기독교 한켠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낯설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주여….


# 49-50절 예수님은 사람을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다(12제자에 속하지 않는다)고 금했다고 요한이 예수님께 전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하시며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고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12제자에 속하지 않는다거나,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있어 결국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바로 앞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제시한 제자의 모습과 상반되고, 그동안 예수님의 사역에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제자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구하시려 오셔서 차별과 배제하지 않으시고 택하신 자들을 다 모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이름을 따라 주신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같은 소속이 아니라고, 사람이 만든 통제와 규제를 따르지 않는다고 금하게하고 배제하는 것은 제자들이 잘못된 특권의식에 빠져서 결국 주님의 뜻과 의도와 권위를 거역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같은 주를 믿지만 섬김의 방식은 문화 세대 지역 민족 신분등의 차이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기에 그런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어떤 경우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의 역사는 다양한 도전들을 품어내되 진리를 훼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견고하게 세워졌으며, 배제가 아니라 수용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융합해 내므로 진리를 더 굳게 세우고 더 넒고 깊고 온전하게 세워지며 다양한 이들을 살리는데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니 배타, 배제, 차별등은 진리를 품고 따르는 이들이 그 진리의 크고 높고 위대함의 권위를 스스로 부인하고 옹졸하고 부족한 것으로 폄하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제일신학을 가진 진리의 신앙을 사는 우리는 더 넓고 더 깊고 더 온전함으로 모든 것을 넉넉하게 품으면서도 스스로 변질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을 변화과 성숙으로 세워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세속적 세상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죄와 악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요컨대 다른 어떤 학문보다 드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다른 어떤 학문보다 폭넓은 가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학문이 그 바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_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_ 김용규_9쪽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중략) 바꾸어 말하자면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위대함과 같은 전근대적·신본주의 가치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성, 계몽, 혁명, 과학, 진보, 해방과 같은 근대적·인본주의 가치들, 그리고 상대성, 다양성, 개별성, 현재서 같은 탈근대적·개인적 가치들까지 우리가 시대를 따라 추구했던 가치들을 모두 되살려 냄으로써 '온전한 가치'가 되게 하자는 겁니다."  _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_ 김용규_98쪽


# 거둠의 기도

주님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고

패역한 세대와 다르지 않은 종을

긍휼히 여기사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봅니다. 

내 눈이 헛된 탐욕으로 점철되지 않게

온유와 겸손으로 옷입게 하옵소서. 

연약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배제와 혐오와 차별로

주의 뜻에 반하는 언행심사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넉넉한 품에

모든 것을 넉넉하게 품어 낼

믿음과 지혜와 능력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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