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30. 2021

누가복음 09:51-62 사명의 길을 굳게 가시는 예수

누가복음 09:51-62 

누가복음 09:51-62 사명의 길을 굳게 가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갈릴리의 사역들(4:14-9:50)을 마무리하시며(9:51-19:27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의 일들) 보내신 이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사명의 길을 굳게 결심하며 나아갑니다. 이 여정에서도 제자들을 양육해 가시는 일에 있어 우선순위와 온전함과 자비를 잃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에 있어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십니다. 


# 51-56절 예수님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의 길로 행하고 계십니다.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행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승천(죽음, 부활, 승천을 모두 포함한)할 기약이 임박한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굳게 결심하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 준비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실 일들과 승천은 정해진 길이 아니라 약속된 길입니다. 이 일을 위해 보냄을 받은 예수님께서 이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굳게 결심하며 가야 이룰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자동으로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실하신 순종과 희생과 헌신과 자기부인의 고난과 수고의 굳은 결심이 수반되어야 하는 길입니다. 죽어야 살릴 수 있고, 그 일이 보냄 받은 목적이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기에 아무렇게나 그냥 갈 수 없는 길이고, 온 인류의 짐을 다 짊어져야 하기에 무거운 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만이 행하실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고군분투하며 이 길로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은 사마리아를 거치는 빠른 길이 있고, 이곳을 거치지 않고 돌아서 가는 더 먼 길이 있습니다. 우선 빠른 길로 행하기 위해 사마리아를 지나고자 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반목과 질시와 대립관계에 있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이 지나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메시아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일이기에 제자들은 사마리아에 대한 그간의 원수를 갚을 날이라 생각하며 불을 명하여 멸하는 것이 어떨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길로 행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거절은 그간 예수님의 사역 여정에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반대하며 대적했던 종교지도자들과 여타의 무리들과 비슷해 보입니다. 잘못된 전통과 오해로 말미암아 뿌리 깊어진 미움과 대립 때문입니다. 서로 미워하며 싸울 이유는 충분하지만 명분없는 싸움이고 서로가 죽는 싸움이며 끝이 없는 싸움입니다. 그런 분쟁과 미움과 거절의 관계들을 화해하고 용납하고 회복해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아직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제자들을 향하여 몸소 사랑과 자비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그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출발하는 상황이기에 이 사건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완수하는 방식의 근저에 깔려 있는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며, 사람들의 눈에는 연약하고 무능하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 방식으로 묵묵히 행하실 것이며, 그것이 보내신 이의 뜻에 합당한 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통치방식은 로마와 같은 힘과 폭력과 무력이 아닌 사랑과 자비와 희생과 섬김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일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죽기까지 충성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가진 예수님께서는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고난 받는 종으로 그리고 가장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행하셨으며, 이제 남은 여정도 동일하게 변함없이 행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더 오래 참아야하고, 더 돌아가야하며, 더 손해 보는 것 같고, 모자라 보이기까지한 모습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면 기꺼이 따라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우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불을 내려 멸하자고 하는 방식은 결국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하는 이들의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천하 만국의 영광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절하라 했던 마귀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 방식은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온전히 살릴수도 없습니다. 계속된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도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심지어 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는 방식입니다. 무력과 폭력은 굴복하게는 하나 즐거이 순종하며 온전하게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도 조급하게 그리고 탐욕스럽게 사람들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면서 무력과 폭력으로 굴복시키려 합니다. 전도와 선교의 방식이 그랬고, 사람을 양육하고 변화시켜가는 방식도 그랬으며, 세상을 향해서도 자비와 긍휼의 눈이 아닌 대적과 원수를 대하듯 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 앞에서는 군림하면서 세상의 가치를 따라 행하는 일에 아무런 거부감도 문제도 깨닫지 못하고 비탈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길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하나님나라의 길이 아니며, 주님이 가신 자기부인의 십자가의 길도 아닙니다. 

제자들처럼 아직 우리도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며 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부족하고 연약한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으로 온전케 하셨음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도 우리의 대적과 원수와 세상을 향하여서 주님의 방식과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기억하며 동일한 길로 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 57-62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모든 우선순위를 주께 두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는 제자가 가져야 할 자세를 세 사람의 사례를 통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따르겠다고 했는데 짐승들도 집이 있는데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두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따르라 하실 때에 아버지의 장사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죽은 자들에게 하라 하고 제자는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라 하십니다. 세번째 사람은 주를 따르기 전에 가족들과 작별하게 허락해 달라 하자 예수님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집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가족의 장례 특히나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일 또한 중요한 일입니다. 먼 길을 떠남에 있어서 가족들과의 작별을 고하는 것 또한 당연히 필요한 일들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보편적인 소유와 누림과 자세를 예수님께서 전면적으로 부인하거나 차단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극단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의 초반부에서 제자들의 기대와 생각들을 비롯한 자세들을 교훈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에 우선 이 사례를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먼 길을 여행하기 위해서 여장을 꾸려 급히  떠나는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이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나라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이미 임했고 그리고 계속 시작된 하나님나라를 가르치고 축귀와 이적과 치유와 회복을 통해서 전파하셨습니다. 제자들 또한 위임받은 권세와 권능으로 이 소식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 나라에 합당한 모습들 중에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역사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무론하고, 남녀노소 빈부와 시눈의 격차를 무론하고 치유와 축귀와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했습니다. 

믿음에 대한 많은 개념과 정의 중에서 한 가지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이는 곧 삶의 이유와 목적이 바뀌는 것이고,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삶을 일희일비하게 만드는 원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헛되고 유한한 것들에서 영원하고 참된 만왕의 왕되신 주님을 최고의 가치와 주로 영접하고 고백하며 그 통치와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모든 소유권을 주님께 이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곧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나 사람이나 사건 보다도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둔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을 좁은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 길에는 때로 우리의 소유를 다 내려놔야하고 때로 아무것도 가진게 없을 수 있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래서 배고프고 고달픈 여정일 수도 있습니다. 존경과 환대가 아니라 손해보고 조롱과 비난과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걸어오신 길도 그랬습니다. 소위 말하는 세상 영광 다 버려야 하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믿고, 주님이면 족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가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 길을 간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세상 영광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도 주님을 따라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나라 탐욕과 욕심으로 점철된 그런 나라를 동경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과의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소중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책임과 의무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도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는 그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중요하다 할지라도 우선순위는 달라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장사하는 일이나 가족과의 작별이 주님을 따르는 데 걸림이 되거나 발목을 잡는다면 제자는 우선순위를 따라 결단해야 합니다. 군사로 부름 받은 이의 우선순위가 바뀔 수 없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이단에서 이러한 구절들을 빌미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과 교리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 가족을 버리고 심지어 고발하는 것을 종용하고 정당화 하는 것은 주님의 의도를 한참 벗어나는 터무니 없는 해석과 적용입니다. 

주님은 모든 관계를 회복하고 살리고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삶의 우선순위를 흩뜨리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게 처신하여 온전한 제자로 살아가는 길로 주님은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얕은 생각이나 욕심으로 주의 일을 그릇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주님께 있음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잘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진리이지 그것을 해석하는 설교가 모두 진리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지켜야지 왜곡된 신념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야 하는 것이지 고착되고 닫힌 교리들을 고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들은 우선순위도 오해하고, 그런 말씀과 뜻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은 항상 그 정신과 취지와 목적을 우선하여 해석하고 적용하고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려는 자에게는 이러한 고민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켠이라도 부족하거나 과하게 되면 극단으로 치우쳐 주님의 뜻에도 맞지 않고 인심도 잃고 관계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특별히 가족은 주님이 허락하신 최소공동체임을 기억하고 그 안에서 각자의 역할과 위치 그리고 사명들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든지 사람받든지 스스로 자립해 가든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처음 사람을 지으시고 태어났을 때에도 가족을 주셨고, 주님을 만나 새롭게 거듭났을 때에도 교회라고 하는 가족 공동체를 주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며 나보다 더 남을 낫게 여기기도하고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통해서 천국공동체로 세워가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려거든 삶의 우선순위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 가는 지혜를 구하고, 결단력 있는 믿음과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랑과 겸손과 온유함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더욱 주께 구하고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되 때로 앞에서도 이끄시고 곁에서 동행하시고, 뒤에서 밀어 주시며, 너무 힘들때는 안고 업어서라도 이끄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 아니면 이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주를 의지합니다. 


# 거둠의 기도

주님이 굳게 결심하고 가시는 그길이

우리를 새롭게하고 살게하신 길인줄 믿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살리는 길로 행하고 따르려거든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알고 고백하며 살라신대로 

분별의 지혜와 결단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도 주옵소서. 

허락하신 가족이 천국 공동체임을 기억하고

주의 뜻을 따라 세워가길 원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가복음 09:37-50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예수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